❋ 본문1절: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느닷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 그로 말미암은 모든 유산까지 다 포기하고 따라나선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은 점점 확장 되었다. 높으신 하나님- 높은 곳에서 나를 자세히 살피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영존하시는 하나님- 나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과 나의 자손만대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깨달았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은 삶의 여정 속에서 체험된 것이었다.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놀랍게 높이며 따르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확실한 것인가? 혹시 마음에는 없으면서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히 찾아오셔서 이름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함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이상 바뀌는 변덕이니까. 사람들의 입술은 아첨하기에 바쁘고 빈 수레와 같으니까. - 아브라함의 마음을 달아보시고자 함이었다. -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과 뒤,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가? 입술로는 믿음 있는 것처럼 하는데 정작 주님의 중요한 일 앞에서는 뒤로 빼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 까지 넘어뜨리는 사람들이 있다. ([잠]16:2: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 이 말씀에서 “시험하시려고” 의 원문은 ‘피엘’ 인데 그 의미는 ‘시도하다’ 이다.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에 무엇이 가장 우선인지, 진실로 하나님만이 전부인지를 알아보려 하심이다. 그러나 단순히 마음을 시험하심이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언약하신 대로 열국의 아버지로 높이 들어 올리시고자 함이었다.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 게다가 지금 그의 삶은 태평천하였다. (당대 근동지방의 최고 권력자인 아비멜렉이 스스로 찾아와 평화동맹까지 맺자고 하여 그에 응하여 브엘세바의 맹약까지 하였다) 또한 부귀영화로 만발하여 세상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은 상태였다. - 사람이 부해지거나 높아지면 마음이 변하는데, 과연 아브라함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최고요 전부는 무엇이었을까? - ❋ [신]13: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 하나님을 우리의 최우선에 두며, 하나님만을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으로 삼고 사는 나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아브라함아!” - 부르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대답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영혼이 잠들어 있으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지체 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깨닫는다. ‘아! 아브라함은 준비된 자요 깨어있는 자로구나! 그는 세상에 잠겨있지 않았구나.’- 오늘 우리는 준비된 자요 깨어 있는 자인가? 세상 것을 품고 사는 사람은 작은 시험에도 그저 무너져 내린다. 세상에서 불어오는 시험이 얼마나 많은가? 맞서고 이기려면 언제나 준비된 자로 살아야 한다. - 특별히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언제 들려올지 모르는데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영광의 소리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는가? - 열 처녀의 비유 중에서 왜 다섯 처녀는 슬기롭다하고 나머지 다섯 처녀는 왜 미련하다 하는가? 그 기준이 무엇인가? ❋ [마]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깨어있으려면 끊임없이 십자가의 주님 앞에서 육체를 비워야하는데 우리 모두 깨어있는 자 되어서 주님 부르실 때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나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을 하자마자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를 번제로 드리라” - 멘탈이 붕괴될 명령이 아닌가? 아마도 잘못 들었나 하고 귀를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 이삭을 향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랑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성취의 희망과 사랑 그 자체였다. 이삭을 자신들의 전 존재 그 이상의 존재처럼 사랑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도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그런데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번제란 제물을 도살해서 완전하게 불로 태우는 것이다. 세상 누가 어찌 이런 끔찍한 명령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 그런데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지체 없는 순종을 넘어 자신을 완전히 꺾어 드린 복종의 모습 아닌가? “하나님! 내가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십니까? 무슨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하십니까? 번제라니요? 이삭대신 양과 소를 천 마리 쯤 번제물로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도 안 된다 하시면 제가 대신 번제물이 되겠습니다. 몇 칠만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얼마나 헌신하고 충성했는데요. 저에게 더 큰 상급을 주시지는 못할망정 왜 이렇게 고난이 많게 하십니까?) - 그러나 아브라함은 반항도 타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명하신대로 묵묵히 행할 뿐이었다.
(❋ [눅]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의 힘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렇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이른 아침부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지체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명령 앞으로 나아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셨을까? - ‘믿음테스트’ 라는 장막을 치시고 아브라함의 행동을 하나하나 살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가슴이 뜨거워 지지 않았을까요? -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하루하루는 어떤가? 믿음의 시험장 아닌가? - 하나님인가? 나 자신인가? -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동일한 믿음테스트를 받는다면 우리의 반응을 어떨까? (너의 재물, 너의 시간 나의 교회를 위해 좀 쓰자 해도 벌벌 떠는 믿음이라면?) - 하나님의 가슴을 뜨겁게 해드리는 나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창]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 집을 떠나 삼일 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이신 곳, 모리아산 근처에 다다랐다. 삼일 길은 70-80km 정도의 거리이다. 아브라함은 그 삼일 길을 걷는 동안 무엇을 생각했을까? - ‘하나님께 반항이라도 해 볼걸! 다시 돌아갈까? 이건 너무나 부당한 명령이야!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이럴 수 없어!’ 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아온 방황하는 길이었을까? 아니면 ‘칠십 오세에 나를 찾아오셔서 여기까지 함께하신 하나님! 야훼께서 말씀하신 일이기에 결코 실수가 없으시다! 내가 헤아릴 수없는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 하나님은 나의 엘 샤다이 이시고, 하나님은 나의 엘 올람 이시잖는가’ 하며 나아온 절대순종의 길이었을까? - 아브라함의 삼일 길은 결코 뒤돌아봄이 없었고, 한 걸음도 흔들림이 없는 절대순종의 길이었다. -❋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방황하는 믿음 아닌 절대순종을 이루어 가는 믿음이 되기를 축복한다.
❋ 본문 5절의 말씀을 자세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자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이 무엇인가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번제로 아들 이삭을 바치고 나면 혼자가 될 텐데 왜 아브라함은 그의 종들에게 ‘우리가 곧 나 아브라함과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독자 이삭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일까? 종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둘러댄 말일까? 그냥 쑥 던진 말일까? 아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결코 확신 없는 믿음이 아니었다.
‘주일예배를 안 드리면 하나님께 한 대 얻어맞을지도 몰라! 예배 안 드리고 찜찜하느니 차라리 예배드리고 마음이라도 편 하자!’ 하는 맘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적 확신에 찬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자신을 부어주신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실 것을 믿고 선포하는 믿음의 실체였다. - ❋ [창]21:12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 ‘하나님의 필요하심을 따라 이삭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나와의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삭을 반드시 다시 살리실 것이다.’ 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명백히 밝힌다.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11: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약속들에 큰 믿음으로 견고하여 집시다.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며 삽시다. 그리하여 모든 시험에서 이기고 하나님의 가슴을 뜨겁게 해드리는 영광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