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1. 가룟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아먹는 존재가 되었을까? 만일 그가 예수님을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로 발견했다면? 자신의 메시아로 만났다면 예수님을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손에 팔 수 있었을까? 그는 예수님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결코 깨닫지 못한 자였다. 예수진리의 힘과 능력은 육체의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하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보았는가? 그는 왜 가룟 유다와는 다르게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드림이 되게 하였는가? 바보여서 돌에 맞아 죽어갔는가? 어리석어서 돌에 맞아 죽는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했는가? 무엇이 그를 죽음도 넘는 강하고 견고한 복음전도자가 되게 하였을까? 오늘 여러분은 주님에 대한 진리를 들었는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깨달았는가? 그 진리의 힘을 체험했는가? 그렇다면 그 진리에 합당하게 살아내라. 그것이 진리에 거하는 신앙인이다. 의지적이고 자발적인 헌신과 충성을 향해 삶을 드리는가?
2.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늘 우리들이 서있는 신앙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맹렬한 불의 심판을 향해 달리던 가룟유다의 영성인가? 아니면 진리의 힘에 붙들려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복음을 외쳤던 스데반집사의 신앙인가?
하나님을 깨달은 진리를 체험한 사람들, 진리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을 입은 사람들,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가치와 능력을 발견한 사람들은 결코 옛사람의 욕심대로 살수가 없다. ❉세상으로 치닫는 욕심의 고리를 끊어라 그래야 생명 된다. 세상으로 쏠리는 눈의 정욕을 닫아라. 그래야 하늘이 선명해진다.
가룟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왜 회개할 줄도 몰랐을까? 그의 죽음은 누구에 의한 누구의 죽음인가?
[히]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또한 스데반집사는 순교당하는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
[행]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receive my spirit.”
같은 죽음이지만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간 두 사람!!! 우리의 육체가 우리를 소멸하지 않도록 아니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빛난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의 투쟁을 벌여야 한다.
❉ 신앙의 길은 투쟁의 길이다. 우리는 늘 영적 전장에 있다. 싸우지 않으면 죽는다. 헌신으로 싸우고 충성으로 싸우고 사랑으로 싸우고 겸손으로 싸우고……
3. [히]10:28-29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
얼마 전 한 방송에서는 어느 대형교회목회자의 생활에 대한 것을 보도했다.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5.400만원 목회비를 모으고 모아 60억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월 7.4% 이자를 받고 교회에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복음적인가? 주님의 말씀이 묻어난 삶인가? 십자가의 가치가 드러난 행위인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은 행위 아닌가?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언약의 피를 부정한 행위 아닌가? 천국을 소망하게 하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행위 아닌가? 이러한 행위로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
그는 분명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찌해서 빠져 나왔던 죽음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되었을까? ❉ 믿음의 행진을 멈춘 그 순간부터 타락은 시작된다. (기도 시간이 줄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충성을 게을리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던가?)
4.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7:20-23절)
과연 우리들의 신앙의 열매는 어떨까? 주님 보시기에 탐스럽고 아름다울까? 주님이 보실 때에 멋지다 하실까? 아무리 주여 주여를 많이 외쳐도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근사한 옷을 입고 선지자 같은 사역을 할지라도, 아무리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삶에서 하늘백성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를 결실하지 못한다면 그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믿음행진을 멈춘 채 살고 있지는 않는가?
❉ 나는 여러분이 머리 교인 되지 않고 가슴 신앙이 되기를 축복한다. 잎사귀만 무성한 자가 아니라 열매 가득한 복스러운 성도들 되기를 축복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조금만 생각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면 무엇이 진리이고 거짓인지,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인지, 누가 그리스도적인가 세상적인지 알 수 있을 텐데….. 너희는 생각하라. 제발 좀 말씀 앞에서 깊이 생각해보라!!! 그래서 복음의 사람이 되어라. 복음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다 하는 의미이다. / 나는 여러분이 빛난 믿음의 사람들,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복음 증인되기를 축복한다.
5. [히]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손은 생명과 은혜와 복의 손이시지만 하나님을 거부하고 따르지 않는 자들에겐 심판과 형벌의 손이 되신다. 이스라엘을 치셨던 하나님의 손을 기억하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왜 이렇게 심각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증언하고 있는가? 인생이라는 삶이 그만큼 소중하다. 영생과 천국의 가치는 그 만큼 놀랍고 영광스러우며 위대하다. 심판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마음은 누구나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친히 사람가운데로 오셨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쪼개어 생명이 되는 양식과 음료로 베풀어주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성찬이다. 하나님의 원수는 바로 1)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하는 자, 2) 십자가의 성찬을 먹지 않고 죄악을 양식처럼 먹는 자, 3)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여전히 죄악에 거하는 자 그리고 4)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게을리하는 자 들이다. 그들에게 임할 것은 오직 심판이라는 것이다.
❉ 달란트비유와 한달란트 받은 자의 심판과 후회: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 나는 여러분이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 잘했다 칭찬 듣고 하늘영광을 얻기를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