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람의 나귀는 어떻게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된 것일까? 그에 반하여 발람은 무엇 때문에 칼을 빼 들고 자신을 죽이려고 서있던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한 것일까? ‘나귀도 보는 것을 사람이 왜 못 본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 어찌 그리도 눈이 어두웠는가? 그 이유는 왜 일까?’ 하는 것입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일에 진실로 눈이 밝았더라면 발락이라는 사단의 뒤를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이 예리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과 미워하시는 일, 칭찬하실 일과 책망하실 일을 밝히 보아서 불의한 삯을 얻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발람은 그 불의한 삯을 받고 진실로 행복했을까? 그 행복의 길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하나님의 성도 여러분!
진실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눈이 밝아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밝은 눈을 가졌다면 ‘넌 이렇게 살아야 해!’ 라고 지시하시는 하나님의 손의 방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손이 지시하시는 방향은 때론 화 같이 보일 수 있으나 화가 아니요 복입니다. 때론 고난같이 보일 수 있으나 고난이 아니요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실 만나! 영광된 승리자가 얻게 될 흰 돌 위의 새 이름은 세상과 섞이지 않는 순결한 믿음으로 이긴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보배의 영광을 거두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밝은 눈! 불순물이 없는 순결한 믿음!!!
2. ‘백성을 정복한다.’ 라는 이름을 가진 니골라에 의해서 시작된 무리의 교리가 바로 니골라당의 교훈입니다. 니골라당이 가르쳤던 교훈이란 ‘한 번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다. 영원히 구원받았기 때문에 육체로 범죄 해도 그 범죄로 인하여 구원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합니까? 만일 성도들이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이면 죄에 대하여 느슨해집니다. 그리고 점점 무감각해집니다. 결국은 타락하게 되어 사단의 도구가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1:15)
죄가 우리 삶을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죄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그것은 여지없이 번져서 우리의 삶을 삼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로마서7:11절)
3. 지금은 그 논리가 조금은 약해졌지만 우리 한국교회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죄를 지어도 버림받지는 않는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논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위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 결과가 개독교입니다. 성도는 의로워서가 아니라 의로운 일을 위해서, 선해서가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세상사람들과 동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믿음과 행위는 같이 다닙니다. 행위가 보증되지 않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절) 따라서 행위가 믿음에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일컬어 주님은 외식하는 사람…희극배우라 하셨습니다.
4.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입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를 흉내 내는 연극배우입니까? 물과 기름은 섞일 수도 없고 섞여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길로만 가야 합니다. 세상이 변했다고 교회까지 변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삶의 기준과 풍조가 시대를 따라 바뀐다고 성도들까지 부화뇌동해서는 안됩니다. 참 신앙의 길은 좁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혼합과 타협은 안 됩니다. 타협과 혼합하는 신앙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절)
영생에 이르는 길이 그렇게 쉽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굳이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을까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만나와 하나님께서 주실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받는 것이 그렇게 쉽다면 오늘 본문은 왜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 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로부터 싸워서 이기는 자입니까? 아니면 적당히 타협하며 어울려 지내는 자입니까?
여러분! 많이 알려 하지 말고 아는 것만이라도 온전히 열매 맺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니골라당의 비껴간 가르침이 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 안의 틈입니다.
5. 여기에서 우리가 좀더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생각해 볼 것은 다름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은 발람의 속임수와 니골라당의 비껴간 가르침으로부터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쏟아지는 설교의 내용들은 어떻습니까? 또한 성도들이 듣고 싶어하는 설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진실로 목회자들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말씀을 전합니까? 아니면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내용을 전합니까? 죄가 자랄 틈, 세상의 재물을 숭배하는 틈을 허용하는 것 아닙니까?
또한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세상은 인공지능시대로 급속히 변화하는데 교회는 왜 아직도 아날로그인가? 교회가 세상을 끌고 가려면 너무 십자가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는데요.’ 이 역시도 죄가 자리잡을 틈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며 다른 종교와 평화해야 한다.’ 라고 합니다. 이 역시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무서운 틈입니다.
오늘도 발람의 속임수는 성도들을 미혹하여 세상에 무릎 꿇게 하고 혼합의 양식을 먹게 합니다. 니골라당의 비껴간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좁은 길에서 멀어지게 하여 십자가의 주님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갑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진실로 복음에 대하여 철저합니까? 혹시 세상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죄로부터 느슨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6.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진실로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 진리의 산을 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요 험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리는 길입니다. 또한 그 길에 오른 소수의 사람들도 힘들고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실한 믿음의 선조들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죽음 뒤의 부활의 영광! 고난 뒤의 영광스러운 상급의 약속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연약해졌던 믿음의 무릎을 세워 달려가야 할 길을 마쳤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4:7-8절)
7. 아!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마친 눈부신 성도들이여! 마침내 달려갈 길을 다 경주하고 주님과 마주했던 성도들이여! 당신들이 보았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해주시오. 당신들의 머리에 씌워진 그 빛난 면류관에 대하여 말해주시오. 그 영광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과연 있겠습니까? ………
주님께서 부르신 성도 여러분!
나는 여러분 모두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내리실 감추어 두었던 만나! 각자의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저 받을 수 없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자에게만 주실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진리와 생명! 그리스도 붙들고 싸워 반드시 이기는 성도들이 되어 그 영광의 상급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으로 이기는 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