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의 몸을 입고 왕궁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로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 섬김 받는 자가 아니라 친히 섬김의 삶을 사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배우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어디에 쌓였을까? 머리였을까? 가슴이었을까? 또한 특권을 가진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들이 배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어디에 쌓였을까? 만일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장들이 예수님처럼 율법과 계명이 가슴에 쌓였더라면 즉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의 본질을 꽤 뚫고 있었다면 그 어떤 일도 해서도 안 된다는 안식일일지라도 소 혹은 양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당장 달려들어 끌어 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주의 자들은 결코 그런 일을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이 머리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놓쳐버린 가슴 없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자칭 하나님의 사람들…..그들의 눈에 비친 마른손 가진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시는 예수님은 이단이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어긴 범법자였습니다. 아니 자신들의 머리에 쌓여있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대한 지식을 부끄럽게 만든 존재였습니다.(눅13:17절 18년 동안 귀신들려 온 몸이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신 후에 일어난 일)
2. 마태복음의 본문 13-14절 말씀 보겠습니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부족한 것을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로 가슴에 새겨진 사람은 손 마른 사람의 아픔과 고난과 눈물을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자신 안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밖에 없고,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으며, 땀 흘리는 자들과 함께 땀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그들이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신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니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29:13절)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친히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습니까?
3. 소아시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또한 회개를 넘어서서 이기는 자 되어 상급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서머나교회: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버가모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두아디라교회: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오늘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이기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4. 오늘부터는 사데 교회입니다. 사데는 당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도시는 크고 견고했으며 무역도시답게 부유했습니다. 그래서 도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려한 생활, 물질적인 풍요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끝없는 소유욕이 불타는 도시가 바로 사데였습니다. 그러한 풍조는 사데 교회 내에도 들어와서 성도들의 영성을 좀먹기 시작했습니다.
재산증가, 물질의 풍요는 성도의 영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점점 죽어가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보다 소유한 것을 더 의지하고, 영적인 기쁨보다 세상 즐거움을 더욱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일인당 국민소득 일만 불 이상이 되면 성도들의 성도됨의 가치는 추락합니다. 부유해지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맘몬이라고 하는 부와 재물의 신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5. 나의 모든 수입과 소유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것이라는 진리로 충만하다면 부자가 될수록 더욱 겸손히 섬기고 충성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맘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사람들은 수입과 소유에 자기의식 즉, ‘이건 내 것이야. 내가 벌은 거야’ 하는 의식으로 인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히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막10:23)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성도가 된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마음과 정신이 의지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또한 무엇이 저와 여러분의 기쁨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유일의 의지요 소망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은사들이 유일의 기쁨이 되는 참 성도가 되기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이제 계시록의 본문 1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의 완전한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하여 한치의 실수가 없는 심판과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심판이요 책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좋은 교회라는 명성은 얻었는데 교회됨의 열매는 맺지 못하고 있다. 겉모습은 성도인데 내면은 세상 사람들과 똑 같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내면의 영성이 일치하지 않아!!!하나님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아!’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어쩌다가 이러한 심판과 책망을 듣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증명을 본문 2절에서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그리스도의 하나님 앞에 한국교회는 괜찮을까? 나는 괜찮을까?
7.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정도 신앙이면 괜찮지 않겠어? 우리의 이 아름다운 헌신과 충성을 좀 봐! 나의 이 선행과 사역들은 얼마나 많아! 우리가 세운 이 교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어. 아주 비싼 자재를 쓴 거야! 그것도 강남땅에……교회에 있는 강대상 내가 헌물 한 거야. 교회에 있는 목사님 의자! 내가 헌물한 거야! 내가 일 년에 헌금하는 액수가 얼마인 줄 알아? 또한 우리교회의 성경에 대한 지식과 열정적인 기도는 어떻고!’ 어쩌면 사데 교회도 두아디라 교회처럼 헌금도 많고 행함도 가득한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마음,….어디에서 비롯된 행위인가? 무엇을 위한 행위인가? …..그들의 영성….진실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행위는 있는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빠져버린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행위는 죽은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8. 주님의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모든 신앙의 행위의 동기와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내 생각, 내 자랑, 내 영광이 아닙니다. 세속의 가치와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여기실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내가 행하는 것이 복음적일까? 혹시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될까? 혹시, 이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을까?’ 아무리 높아지고 아무리 부유하게 될지라도 이러한 고민으로 우리자신을 하나님께 매 순간 일치시켜 행해야 합니다.
9. 오늘 우리는 10년 20년 혹은 30년 50년 이상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데 교회와 같은 심판과 책망을 듣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산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사람보기에는 그럴듯하여 칭찬 들을 만한데 정작 하나님께는 인정할 받을 만한 것이 없는 신앙이라면?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거나 더 세속적이라면?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 날에 뭐라 항변하며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흰옷을 입음! 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흐려지지 않고 선명하게 기록되는 영광….그러려면 이기는 자 되어야 할텐데요
사도바울은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 할 분명한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6;9-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