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예물을 소로 드리려거든, 화목제의 예물을 양으로 드리려거든, 어린양으로 드리려거든, 염소로 드리려거든.......화목하게 하는 제사를 통하여.....죄인 된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면 허무와 실패와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유전인자로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the breath of life)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2장7절)
그래서 화목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며 교제하게 됨으로 생명이 번성하는 삶을 살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그것은 이 사막 같은 세상에서 마르지 않는 생수 샘을 마심이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옥토의 풍요로운 복을 누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화목합니까?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친밀합니까? 나를 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제는 소가 아니요 양도 아니요 염소도 아닌 예수그리스도이신데.........나는 예수 앞에 합당한가?
2.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이 그 재산을 자랑하고 있더라도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있을 때까지는 그를 칭찬하지 말라’ 부자 됨이 아니라 부자 됨의 가치를 열매 맺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교회라는 소리 듣는 교회도 있고, 화려한 예배당을 가진 교회라는 소리를 듣는 교회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교인이 많은 교회, 한국으로 말하면 서울의 중심에 있는 교회들은 넘치는 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가 재정이 넘칠지라도 그 헌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느냐 책망 받느냐가 결정됩니다. 돈의 사용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헌금사용은 한 사람의 삶의 가치의 방향, 한 교회의 존재의 이유를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3.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날의 언어로 하면 부자교회였습니다. 교회의 재산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까요. 약 40만평의 땅이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곳에 엄청난 규모의 예배당 외에 1,500평 정도의 원형극장과 약 만 명을 수용 할 수 있는 원형운동장뿐 아니라 다양한 부속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더불어 살아야 할 교회가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부를 얻으려하고, 오늘 우리의 교회들은 왜 부흥을 원합니까? 무엇을 위한 부요, 무엇을 위한 부흥입니까? 진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입니까?
그러나 라오디게아의 교회는 그 모든 부요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영광을 자랑하기 위한 것에 사용하였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며, 교회의 실제이신 예수님은 문 밖으로 쫓아내버리고 자신들만을 위한 교회, 자신들만을 위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의 단절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신데 예수님과 단절되었다면 그 자리는 혼돈이요 불법이요 죽음이 역사하는 곳이 됩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바로 그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상태” 과연 누가 이들을 진리와 생명으로 소생시키겠습니까? 이들이 살아날 비결은 무엇입니까?
4. 본문 20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쫓아낸 그 사람들을 다시 초청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기를 원합니다. 그 첫째는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내가 너희를 다시 살려내기를 원한다. 너희에게 생명의 부요와 의로움의 아름다움과 영의 기름진 열매를 주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들이 닫아 걸은 문 앞에 계속해서 서있게 될 것이다. 너희를 향한 나의 이 뜨거운 사랑의 두드림은 계속될 것이다. 내 안으로 다시 들어오라’ 그 말씀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가슴 아픈 사랑의 노크요 애타는 생명으로의 초대입니다.
5. 주님의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누구와 무엇으로 어우러져 있습니까? 진실로 예수님과 더불어 입니까? 나는 여러분의 삶이 언제든지 예수님과 일치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삶의 문밖, 여러분의 마음의 문밖에서 온종일 서계시며 노크하고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문, 마음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이유는 ‘예수 믿으라.’ 함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교제를 계속해야만 한다는 성화로의 초대입니다.
디도서1장 16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다움의 삶의 행위가 없다면 그는 가증한자요, 불순종하는 자요, 선한 일에 눈감은 자라 unfit for doing anything good.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무늬만 예수 사람 아닌 진실로 예수를 열매 맺는 참 성도로의 초대입니다. 저는 여기에 있는 주님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 믿는 것을 넘어 그 삶에서 예수복음이 꽃피고 열매 맺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두 번째의 말씀은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입니다. 우리 사람은 주어진 생명을 받아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내 것이라고 여기는 이 생명에 대한 주권이 없습니다. 이 지구상의 그 누구도 5분 뒤 혹은 10분 뒤의 지금 숨 쉬는 자기 생명에 대하여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불확실성의 존재! 그에게는 누가 절대적이겠습니까?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요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행동을 하라’ 는 것입니다. 곧 ‘너희의 삶의 문, 마음의 문을 나를 향하여 열어라. 아니 반드시 나를 향하여 나아와야만 한다.’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은 온 세계와 온 인류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관통하는 소망의 음성이요 치유의 음성이요 회복의 음성이요 은혜와 복의 음성이요 진리와 생명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음성이 계속해서 들려짐에도 문을 열지 않는다면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맹인 된 인간존재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문을 열 때 그는 회복을 넘어 성장하게 됩니다. 치유를 넘어 강건하게 됩니다. 소망을 넘어 꿈을 성취하는 사람이 됩니다. 은혜와 복을 넘어 십자가의 구원을 성취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귀에 여러분을 향해 노크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예수님과 어우러지고 예수님으로 여과된 삶으로 이 땅에서도 보배를 결실할 뿐 아니라 약속하신 하늘의 모든 복을 성취하는 여러분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이제 세 번째의 말씀은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온화하고 가장 평안하고 가장 복된 메시지입니다. 일치와 생명입니다. Unity and life........하루의 고단한 수고를 마치고 한 식탁에 둘러앉아 사랑하는 식구들과 더불어 먹는 화목한 만찬.........식구들은 그 자리에서 사랑으로 교제하고 위로로 축복하며 소망으로 힘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 모두를 식탁의 교제와 같은 친밀한 교제의 자리로 초청하시고 일치를 이루고 생명을 결실함으로 종국에는 영원한 잔치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시겠다는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계시록의 본문 21절의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는 약속의 말씀과 평행을 이룹니다.
8. 나는 세상의 그 어떤 부자도 그가 가진 재산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세상의 그 어떤 권력가도 그 권력으로 영생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인도, 그 어떤 능력자도 그가 가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예수그리스도와 일치하고 화목하며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다 인생 승리했다 보배를 결실했다 하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 택함을 입은 여러분! 여러분은 진실로 예수님과 일치하며 화목합니까? 교제하며 성숙해져가고 있습니까?
본문 20-21절 말씀 다시 새기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