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 계신 하나님!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열매 맺음을 믿는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 [창]26: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창]26: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던 이삭이 극심한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던 중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명하시고 약속하셨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곳이 그랄이었다. 이삭은 하나님의 명하심과 약속하심에 그대로 순종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그 해에 백배의 기적의 결실을 주셨고 마침내 모든 가축들이 풍성해지고 많은 종들을 거느리게 되는 거부가 되게 하셨다. 순종하는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자녀, 믿음의 자녀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신다. 순종하는 자녀들을 존귀의 앞잡이가 되게 하신다. - 여러분이 이 시대에 이삭처럼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고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한다.
❋ ‘굶어 죽는 것만은 면하자’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던 이삭이 어마어마한 부자 곧 거부가 되자 그랄왕 아비멜렉이 시기와 질투로 불타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피난민 이었던 이삭이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랄왕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명령한다.
본문16절-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이삭을 가만히 두었다가는 자신들에게 어떤 위협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비멜렉의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이삭이 백 배의 기적의 풍년의 복을 거두고 마침내 거부가 된 사실을 보았다면 더욱 그를 가까이 두며 관찰했어야 한다. 그가 복을 받은 비결이 무엇인지, 그가 어떻게 해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는지, 그가 어떻게 해서 강성하게 되었는지를 곁에 두고 자신도 그렇게 따라 했어야 했다. (❋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지혜로우라. 복 되고 아름다우며 향기롭고 은혜 풍성한 사람들의 삶을 보고 배우라. 시기 질투는 성도들의 것이 아니다. 시기 질투가 심하면 결국 망하게 된다.)
❋ 그랄 곧 블레셋왕 아비멜렉의 배척에 이삭은 그랄의 중심부를 벗어나 외곽에 자리를 편다.
❋ 본문17절-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이 부분에서 생각해 볼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그랄 골짜기의 의미이다. 골짜기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삭은 지금 떠밀려서 그랄에서 가장 외진 곳, 험한 곳, 버려진 것 같은 황폐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삭은 왜 그랄왕 아비멜렉의 퇴거명령에 그대로 따랐을까? 마침내 거부가 되었고 어마어마한 종들도 거느리고 있어서 한판 붙어 볼만했는데 그는 왜 그렇게 순순히 물러섰을까? - ‘내가 누군 줄 알고이래? 내가 가진 부와 힘이 보이지 않아? 한번 붙어볼까?’
❋ 맞설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삶이다. 이삭이 믿은 것은 오늘 쥐고 있는 자신의 부와 힘과 능력이 아니었다. 이삭이 신뢰한 것은 자신의 오늘을 세우신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어느 곳에서든지, 언제든지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실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이삭은 싸움의 자리를 피한 것이다. - 자신의 부와 힘과 능력을 믿는 사람은 그 힘으로 사람들과 싸우고 분쟁하며 원수를 만들어 간다. 온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 않는다. 평화를 만들고 적을 오히려 친구로 만들어간다. - 오늘 여러분의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모아둔 재산인가? 여러분을 세워 가시는 하나님인가?
❋ [창]26: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
그랄골짜기에 장막을 친 이삭은 오래전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 그리고 그 우물의 이름을 아버지가 지은대로 브엘세바라하였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때 당시 그랄왕 아비멜렉과 맺은 평화조약의 이름이었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났다하더라도 선대의 평화조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의 이런 마음과 달리 그랄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삭을 괴롭혔다.
❋ [창]26: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창]26: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창]26: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그랄의 외진 곳, 험한 곳에서도 하늘을 열어 계속해서 복을 부어주셨다. 계속해서 우물을 파야할 만큼 가축이 심히 번성해졌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과 은혜는 어느 곳에서든지 언제든지- 그곳에 광야든지, 한국이든지, 헝가리든지, 마른땅이든지- 반드시 내려진다. 우물을 팔 때 마다 물이 솟구쳐 올랐다. -사막에 시내가 흐르게 하시고 광야를 꽃과 열매가 가득한 옥토로 바꾸어 주신다. 외진 골짜기를 풍요로운 초장이 되게 하심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세상의 세력들은 끊임없이 공격하고 협박하며 다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 이런 강도들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나 악한 사람들인가? 우리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실상을 보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 잘 되는 것, 번성하고 번창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는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방해하고 괴롭히고 허물려하지 않는가? 같이 싸워보자며 진흙탕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가? 그래서 삶이 뒤죽박죽되고 마음이 엉망진창 된 적이 없었는가?
❋ 이러한 때 과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이 싸워야할까? 본때를 보여주어야 할까? 그래서 이기면 과연 싸움이 끝날까? - 이삭은 그때마다 조용히 물러선다. 에섹이라는 우물도 내어주고 싯나 라는 우물도 내어준다. 애쓰게 팠는데, 고생해서 팠는데 그곳을 포기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손해 보는 마음이 얼마나 쓰렸겠는가? - 그러나 이삭의 마음이 위대하지 않은가? 이삭의 거룩한 인격이 빛나지 않은가? 과연 그러한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믿음의 아버지가운데서 하나님을 보아왔고, 모리아산에서의 여호와 이레의 영광을 마주했기 때문 아닐까? - 자녀들에게 보여지는 믿음) -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 성도는 이 땅의 삶을 팔아 하늘을 사는 사람들이다.
❋ [창]26: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에섹과 싯나의 우물 곧 다툼과 괴롭힘의 시간을 지난 이삭에게 하나님께서는 르호봇이라는 우물을 주셨다. 르호봇 이란 이름의 의미는 ‘장소가 넓다’ 이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 좁은 곳에서의 번성은 한계가 있다. 커피 잔만 한 공간에는 겨우 물 한 컵 밖에는 담을 수 없다. 파이 한 조각으로는 한 사람 먹기도 부족하다. 다투어서 얻는 재물은 영원하지 않다. -르호봇이 될 때만이 그곳은 계속해서 번성하고 확장되고 번창해 갑니다. - 여러분의 삶이 르호봇이 되기를 축복한다.
❋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에섹에서는 번성할 수 없다. 싯나에서도 창대 할 수 없다. 르호봇으로 나아가야 한다. 싸우고 다투는 마음보를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복을 확장 할 수 없다. 싸우고 다투는 마음은 커피 잔만 한 마음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졸보라 한다. -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은 흉년 가운데서도 백 배의 결실이요 거부가 되게 하는 것인데 졸보의 마음보를 가지고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 위대한 복을 받고 싶다면? 번성하는 복을 받고 싶다면? 에섹도 내어주고, 싯나도 내어줄 수 있는 마음보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영혼이 르호봇- 넓고 넓은 곳이 되기를, 여러분의 마음이 르호봇 - 광활하고 광활한 곳이 되기를, 여러분의 삶이 르호봇 -풍부한 곳, 번창하는 곳이 되기를 축복한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에섹을 지나야 합니다. 싯나의 땅도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르호봇이 주어집니다. 이 복에 복을 결실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