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통치 그리고 인간의 반역: 온천지 만물가운데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을까요? 작은 풀포기 하나에서부터 온 우주의 모든 오묘한 운행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통치하심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찬양받기를 바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생기를 받은 사람들로부터 가장 깊은 찬송과 감사와 존귀를 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를 입은 피조물인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가장 많은 상처와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음까지 당하셨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평과 정의의 통치하심, 천상의 혼인잔치를 위한 사랑과 자비의 행하심은 계속되고 있는데 이 땅의 사람들은 과연 어찌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세상가운데서 성도로 부르심은 받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나와 세상의 다름이 무엇입니까? 외모입니까? 언어입니까? 아니면 그분에게 합당한 행함입니까?
2. 할렐루야의 이유: 오늘 본문은 1-6절과 7-10절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먼저1-6절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가운데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말씀은 “할렐루야!” 곧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신약의 말씀가운데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말씀인데 무려 4번이나 계속적으로 반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온천하만물이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사실은 왜 이렇게 크고 웅장하며 장엄한 할렐루야! 의 심포니가 계속적으로 울려 퍼지느냐? 여호와를 찬양함에 궁극의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심판: 첫째는 본문 2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곧 성도들의 고난의 값, 눈물의 값, 아픔의 값, 그리고 피의 값을 갚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성도들이 참고 인내하고 참아내며 싸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들의 고난이 고난으로, 눈물이 눈물로, 아픔이 아픔으로, 피 흘림이 피 흘림으로 마감되지 않게 하시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사도바울을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의 행진은 비결은? 의로우신 심판 곧 상을 주시며 영광과 영예를 주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회복이요, 역전이요, 영광입니다.
3. 통치하심: 두 번째, 천상에서 세세토록 울려 퍼지는 할렐루야!!! 찬양함의 이유는 본문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그렇습니다. 할렐루야!!!의 끊임없는 찬양의 심포니가 울려 퍼지는 궁극의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하심, 다스리심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하루하루는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눕고 일어남, 걷고 뜀,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 어제와 오늘, 실패와 승리 속에서의 깨달음, 막힐 때와 형통할 때의 가르침,.......과연 어느 것을 소홀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때로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안타깝고 절망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성도의 성도됨을 위한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습니다.
전능자의 통치를 신뢰하는가?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하심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눈에, 내 몸에 좋은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육체의 욕망 때문에 전능자와 사람사이에 세워졌던 혼인을 파탄시킨 아담과 하와와 다름없는 타락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부할 때든지, 가난할 때든지, 약할 때든지 강할 때든지, 막힐 때든지 형통할 때든지 삶의 모든 과정이 나의 나됨, 곧 육체의 사람으로 하늘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에서 마지막까지 이르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총체적인 통치하심은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생의 나라에서도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진실로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결단코 나로 복되게 하시고 보배롭게 하시며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믿습니까?
4. 어린양의 혼인잔치: 이제 본문7-10절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양의 혼인잔치, 천상에서 벌어지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7절과 9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그렇습니다. 혼인잔치보다 더 즐거워할 일, 기뻐할 일, 혼인잔치보다 복된 날이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춤추는 날이며 기뻐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신부로 단장한 사람은 얼마나 그 신랑에게 복된 사람입니까? 인간의 혼인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천상의 혼인잔치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 기쁨의 잔치, 즐거움의 유일의 주인공으로, 복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름을 받고 청함을 받았다면 그에 합당하게 준비되어야 할 텐데.......우리는 과연 그 영광의 혼인잔치에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5. 왜 어린양의 혼인잔치인가: 이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만남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비유하셨을까?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구약의 말씀 한 곳만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54장 5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시며 이스라엘은 그의 아내가 된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까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었으면 하나님자신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말씀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데 더럽기가 짝이 없는 인간의 남편이 되신다는 말씀입니까? 참으로 놀랍고 측량할 수없는 사랑입니다.
보잘것없는 한사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은 굽이굽이 도대체 얼마나 크고 넓은 사랑을 입었습니까?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얼마나 타락하였으면 그 얼마나 하나님을 반역하였으며 그 얼마나 그 품을 떠나 살았습니까? 오죽했으면 이스라엘을 타락한 백성, 음란한 여자로 비유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세아2:19) 아! 영원한 사랑이여!!! 절대적 사랑이여!.........그렇습니다. 절대적 사랑. 영원한 사랑의 완성, 아담이후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혼인의 회복이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