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화 : 포기하지 않는 복음 전도 집회 단기선교)
* 오늘 본문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값을 통하여 삶의 자리와 영혼의 위치가 바뀐 사람들입니다. 말할 수없는 영광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르기 전,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죄 가운데 거하였든지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그 위치가 뒤 바뀌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들의 죄와 허물이 완전하게 죽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허물을 안고 있는 육체를 입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쉴 새 없이 죄와 허물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죄악을 찍어내는 공장 같기도 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거짓과 불의가, 탐욕과 이기심이, 음란과 정욕이, 무정함과 살인이 셀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온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삶인데도 말입니다. 이 모순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런즉 어찌하리요.”
* 가끔 어떤 분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살인은 특별한 범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뉴스거리인 살인청부 혐의를 받고 있는 김 형식 서울 시의원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고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적인 살인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살인에 해당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아니라고요? 천만에요.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는 살기가 흐르는 것이 인간존재의 실체입니다. “저런 것은 귀신도 안 잡아가나? 저런 것은 일찍 죽지도 않고 뭐하는지! 너 같은 놈은 얼른 죽어야 마땅해!”
* 그러니 과연 이런 죄의 실상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세상 사람과 별반 차이 없이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 존재를 어찌하면 좋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에는 가능성이 없어!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더 이상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하며 신앙을 포기해야 할까요?
*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비록 회심을 하였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 안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와 허물을 지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서 그리스도께로 끊임없이 진행해 나가는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 얻는 율법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 구원 얻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죄에 넘어졌을지라도 여전히 복음 안으로 들어가고, 연약한 육체로 인하여 의인으로 사는 것에 번번이 실패했을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우리 육체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며 생명과 능력과 자유를 새롭게 부어주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신앙! 낙심하지 않고 복음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열매를 맺습니다.
* 우리들의 심장에 이 사실을 다시 새겨놓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여전히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서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깨달은 사람이란 비록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죄악에 넘어졌을지라도 여전히 복음행진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용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육체의 연약함속에서도 여전히 예수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까? “그런즉 어찌하리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예화: 단기 선교 팀의 순종과 하나님의 영광을 봄/ 9인승 자동차운전)
*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형식적인 제사에 매여 있는 것은 싫어하시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에 그 생명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을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믿음과 순종은 서로 일치합니다. 동전의 앞면뒷면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믿음과 순종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순종은 있을 수 없고 순종 없는 믿음의 성취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순종의 영토, 그 지경을 사망과 생명, 죄악과 의의 지경으로 까지 확장시켜 놓고 있습니다. 순종을 그만큼 강조한 것입니다.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우상을 만들던 자신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살아가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과의 동행!” 그 영광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광의 삶의 여정은 순종이라는 육체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들로부터의 자기 절단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의심과 두려움, 낙심과 절망, 욕심과 욕망이라는 육체가 꺾이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잔인한 것처럼 여겨지는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심은 백세에 얻은 약속의 아들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세상에나! 부족할 것이 전혀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일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까?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입니까? 자신들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사랑! 절대사랑!” 그런 존재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어떻게 번제로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어떤 불평이나 항거를 일체하지 않고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 모리아의 산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번제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올려놓고서 이제 짐승을 잡듯 죽이려고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 창세기 22장 10절에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하더니”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볼까요? 아들을 죽이려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여있는 아들. 당시 그 두 사람의 심경은 도대체 어떠했을까요? “아브라함이여! 그때 당신이 손에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했던 심경을 들려주시오. 이삭이여! 그 순간! 당신의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려던 그 순간의 심경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시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리아의 한 산에 올랐을 때 이 두 사람,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미 죽었습니다. 육체의 생각들이, 육체의 연민이, 육체의 고통이, 육체의 인정이, 육체의 원망이 이미 다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는 오직 전능자의 뜻만이 살아 있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순종의 길에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그러고 보니 순종은 자신이 죽어야 가는 길이네요.
* 참으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삭과 아브라함, 이 두 사람은 순종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된 생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동일한 부르심 가운데 있는 우리는 어떤 신앙으로 서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명하심에 대하여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순종할 것입니까? 순종의 사람! 바로 그가 하나님께 주목받는 의인이 됩니다. 순종의 사람! 바로 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뒤를 잇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생명과 사랑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 이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아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있는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함께 생각해보고자하는 것은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입니까? 이러실 거면 왜 주셨는데요? 저는 못합니다. 차라리 제 생명을 가져가시지요?”
* 만일 아브라함이 이렇게 도전했더라면 아브라함은 살아도 산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삭 역시도 번제로 바침이 되지 않아서 살았어도 죽은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죽은 자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이삭과 아브라함이 죽어야 행 할 수 있는 순종을 통하여 죽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의에 이르는 생명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불순종은 죄에 거하게 하는 죽음이 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8-9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순종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불순종의 사람입니까? 죽음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의의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합니다.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리라” 이것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