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 24-27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하나님 안으로 부터 나오신 예수님이 당시의 종교주의 자들로부터 악귀의 우두머리라는 이름의 바알세불이라는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 아닙니까? 가짜가 진짜더러 가짜라 했으니, 귀신들린 자들이 참 하나님이신 주님께 바알세불이라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런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다면 하물며 주님의 제자 된 우리는 어떠해야겠습니다. ‘너는 가장 악독하고 더러운 귀신이야!!!’ 라는 불명예보다 더한 고난을 받을지라도 당연함으로 여겨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님보다 더 심한 모욕을 당하고 수모를 겪을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당하는 수모와 고난을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진 우리가 되어야 마땅하겠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교인들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주시는 은혜와 복은 그렇게도 누리려하면서 주님의 복음을 위한 수고와 눈물의 자리는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때문에 당하는 수모와 고난과 눈물과 핍박의 가치는 주님의 시간이 차면 반드시 드러납니다. 아니 주님께서 복음을 위해 욕을 먹고 박해를 받은 성도들의 신앙의 가치를 친히 드러내시고 상급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하기에 힘써 복음을 전하라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복음전파의 사명의 터는 온 세상 만민입니다. 그리고 복음전파의 사명은 힘 있고 거침이 없어야 합니다. 복음전파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이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님의 피의 복음을 거침없이 전하고 있습니까? 만일 전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주님의 날에 그 이유가 합당하다고 받아들여지겠습니까? 복음전파! 누가 맡긴 사명입니까?
3. 본문 28-31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우리가 잠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누구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대상은 누구일까요? 우리성도들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계실 만큼 우리를 면밀히 붙들고 계시는 주님의 존재를 발견했다면 복음을 든 성도의 발걸음은 눈에 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외치는 그 목소리는 백두산을 넘어 히말라야도 넘을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두려워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써 외쳐야 할 일에는 소리도 못 내고 오히려 겸손으로 잠잠해야 할 일에는 핏대를 높이는 어리석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이시라면 여러분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겠습니까? 여러분에 대한 주님의 사랑의 가치와 그 무게를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세상을 살아가는 힘과 능력은 하늘까지 닿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기탱천하듯 하는 그 삶의 힘과 능력의 분화구는 세상의 자랑과 영광이 아니라 예수복음을 위한 희생제물이 될 것입니다. ‘주여 나를 사용하소서!’ 나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용광로의 불보다 더한 열정으로 쏟아내는 삶의 힘과 능력 분화구가 오직 예수복음전함이기를 그리고 예수복음이 거침없이 전해지는 일에 희생제물처럼 드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이제 계시록 9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이제 그리스도께서 다섯째 인을 떼십니다. 아주 성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다섯째 인이 열리는 동시에 사도요한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한 제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제단아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은 마치 레위기의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위한 희생제물이 된 수송아지의 피를 연상하게 합니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레4:3-7절)
사람의 허물로 인하여 희생의 제물 된 수송아지의 모습! 사람들의 영원한 속죄 제물로 골고다 언덕에서 희생제물 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희생제물 된 순교자들의 모습........그 모습들이 우리의 눈과 마음에 가득히 채워지면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되겠습니까? 주를 위한 눈물과 수고와 핍박과 고난을 과연 회피하겠습니까?
5.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사실.........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슬픈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벅찬 기쁨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죽은 자의 색깔인 청황색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승리자의 색깔인 흰색을 하고 있을까? 고통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광채 나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세상과 육체의 탐욕에 이끌려 살다가 죽은 사람들의 모습은 슬피 우는 모습과 함께 심각한 고통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주검은 청황색을 띠고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22:11-14절) (미켈란 젤로는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그림1.2))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삶으로 마감한 성도들의 모습은 흰옷을 입고 벅찬 기쁨과 함께 빛나는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행7:55-56절) (미켈란젤로가 그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그림3.4) 구름타고 다시 오실 주님의 시간이 가까운 이때에 나는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을 위한 희생제물, 주님의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헌신과 충성의 제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본문 10절 보겠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순교의 피를 흘리며 죽임당한 거룩한 성도들이 옹졸해진 것일까? 끝까지 용서하지 순교자까지 된 마당에 무슨 억울함이 있어 ‘우리의 핏 값을 갚아 달라 원수를 갚아 달라’ 호소하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원수를 갚아 달라 피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자들의 이 탄원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정의의 심판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찌 죄인과 의인을 같은 자리에 두시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았던 악인은 악인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고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았던 의인들은 의의 상급을 받아야 마땅하지 하지요?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계19:2절) 의인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상은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울까? 나는 여러분의 상급이 크고 놀랍고 영광스럽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이제 1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여러분은 이 말씀 속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여러분을 복음전파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떠한 부르심입니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원받을 자의 수가 차기위한 희생제물을 위한 부르심 맞지요?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과연 누가 하나님의 구원받을 자의 수, 영적인 십사만 사천을 채우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겠습니까? 복음전파는 누가해야 하는 것입니까?
누가 눈물로써 복음의 씨를 뿌리며 누가 헌신과 충성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야겠습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수 곧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원받을 자의 수가 채워지기 위해서는 순교적 희생제물이 필요한데 과연 누가 주님의 복음을 위한 사명자로 나서겠습니까? 여러분이 복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