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 추수감사주일에 자신들의 한 달 월급 전부를 드린 성도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을 향해 열린 눈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요? 그들이 이 땅에 속한 세속의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면 어찌 가능했을까요?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낼 성도들에게 주실 하늘상급은 얼마나 아름답고 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실 하늘상급!!! 그것은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산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1. 오늘의 증언은 지난주의 말씀 길을 따라 다음의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과연 어떠한 삶이 부요한 삶일까요? 어디 쌓아 둘 곳이 없을 만큼 재산이 많이 있으나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재산을 쌓아놓기는커녕 겨우 하루 일용할 양식밖에는 없으나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일까요?
그렇습니다. 성도라면 영적인 이론으로는 후자가 부요한 사람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적인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일용할 양식이라도 감사합니다.’ 라는 신앙의 방식을 붙들고 산다면 우리의 손은 언제나 나눔에 대하여 부요 해 질것입니다. 내 손에 겨우 두 개의 빵이 있을지라도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하나를 기꺼이 내어줍니다. 모든 보물보다도 더 크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2. (지난번에도 말씀했듯이 자신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세 개의 곶감가운데 두 개의 곶감을 기꺼이 나눈 집사님의 그 부요의 힘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이겠습니까?) 부요함이란 손에 쥐고 있는 것, 쌓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손에 쥔 것을 흘려보내지 못하면, 쌓아놓은 것을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욕심이요, 집착이요, 하나님과 담을 쌓아놓고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청년이 왜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겠습니까? 소유를 여전히 쥐고 살며 재물을 여전히 쌓아놓고 살고 싶어서가 아니겠습니까? 보이는 세상을 붙들고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소유는 무엇입니까? 꽃처럼 시들고 안개처럼 쉬 사라져 버릴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과 충성, 겸손한 섬김, 신실한 믿음, 넘치는 사랑이 여러분과 저의 소유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제 우리는 본문 9절에서 우리의 심장을 향하여 화살보다도 더 예리하게 꽂혀지는 단어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칭 유대인” 이라는 단어와 “사단의 회당” 이라는 단어입니다. 본문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당이라”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유대인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운데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친 백성, 선민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가운데 유일하게 구별된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 사랑 받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을 향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회당” 이라 명명합니다. “유대인과 사단의 회당” 이것은 극과 극의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사랑과 미움,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 그 이상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사단의 무리” 라고 엄위하게 지목하신 것입니다.
4. 그렇다면 던져지는 질문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우리에겐 모세의 율법이 들려있어!’ 했던 자칭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의 친 백성의 자리에서 “사단의 회당” 이라는 저주스럽고 모독적인 자리로 추락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세상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1)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약속하신
2) 메시아를 깨닫지도 못하고 거부하면서 썩은 시체가 가득한 무덤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건 믿음의 삶을 살아
가는
3)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의 삶을 방해하고 그들을 환난가운데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우리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어느 자리에 서있는지!!! 혹 우리는 자칭 유대인처럼 자칭 성도, 자칭 집사, 자칭 장로, 자칭 목사로 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행위 하나만 믿고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더 나아가 주여! 주여!는 외치는데 세속의 사람들처럼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삶을 살지는 않는지? 성경에 대한 지식은 있다 하는데 인격과 성품은 여전히 바닥은 아닌지? 심각히 우리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나는 성도입니다. ‘라고 외치며 사는 우리에게 ‘넌 성도가 아니야. 나의 사람이라면서 어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어. 넌 오히려 사단의 종이야’ 라고 명명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기!!!
6. 이제 본문 10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사단은 끊임없이 성도들을 각가지 환난과 시험으로 공격해서 파멸시키려 합니다. 건강으로, 사업에서, 물질로, 자녀 때문에, 탐욕으로, 시기심으로, 위협과 협박으로….. 사단이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파멸시키려는 도구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환난과 시험은 본문의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하신 말씀처럼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환난이 아무리 커 보여도 그것은 믿음으로 맞선 자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세상의 모든 환난을 이기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마가복음4:40절) 큰 믿음, 절대믿음, 오직 믿음, 견고한 믿음이 되어 사단의 모든 환난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환난과 시험과 고난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복을 얻기를 바랍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베드로전서1:7절)
7. 다시 본문 10절 하반절 말씀 보겠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렇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성도라는 겉모양만 있다고 해서 성도가 아닙니다. 목사, 선교사도 무늬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늬는 성도인데 하늘백성다운 믿음승리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어찌 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 성도들의 심장은 신체적인 장기의 심장이 아니라 “죽도록 충성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 이라는 “믿음의 사명의 심장” 으로 뛰고 있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자 하는 “믿음의 사명의 심장” 이 뛰고 있는 사람에게 무엇이 장애가 되겠습니까? 가난이, 환난이, 위협이, 협박이 그의 믿음의 심장을 멈추게 할 것입니까? 죽음도 결코 그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신체적 장기의 심장을 죽도록 충성이라는 믿음의 사명의 심장으로 이식 받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1) 생명의 면류관... ,영원토록 마르지 않는 면류관!
2) 생명의 면류관….. 승리한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
3) 생명의 면류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토록 왕의 영광을 누리게 할 면류관을 다 차
지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