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사밧이 받은 은혜와 복: 유다 이스라엘 4번째 왕이 되었다. 사방의 대적이 유다 이스라엘과 싸우지 못하도록 강하게 하셨다. 블레셋 사람들이 때를 따라 예물을 바쳤고 은으로 조공을 바쳤다. 아라비아 사람들도 조공을 바쳤는데 숫양 칠천칠백 마리와 숫염소 칠천칠백 마리였다. 유다의 여러 곳에 성을 세우고 요새를 지어서 나라를 힘있고 견고하게 하셨다. 특별히 예루살렘에는 특수 부대까지 둘 정도였다. 군사의 수효는 무려 118만 명이나 되었는데 그 용맹을 당해낼 대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호사밧 자신도 부귀와 영광이 얼마나 컸는지 온 세상이 다 알 정도였다.
그 비결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섬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역대하17:3 -6절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바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세상의 지혜와 경험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다워야 한다. 세상사람과 나란히 서면 다름, 차이가 선명해야 한다. 먹는 것이 다르고 마시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과 다름의 방식인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가운데 살아 이 시대의 여호사밧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왕의 복을 누리기를…..
2. 오늘 본문은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 구약의 제사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옛 것의 한계와 새것은 유한함을 증언하고 있다.
본문은 1-10절과 11-15절까지 구분된다. 1-10절까지는 구약의 제사예법과 그 한계성을 알려주고 있고 11-1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제사와 그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법대로 제사해야 했다. 제사할 곳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된다. 첫 장막이라 부르는 성소에는 하나님의 진리와 계시를 의미하는 등잔대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양식을 반드시 공급하시겠다는 의미의 상과 진설병이(7kg의 빵) 놓여있었다.
3. 휘장 뒤의 장막은 지성소라 불리는데 지성소는 하나님의 실제적 임재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들인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매일 정해진 예법에 따라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 일년에 단 한 차례 들어가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이때는 반드시 짐승을 잡아 희생제물로 드려야 했디. 본문7절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4. 그러나 그 모든 제사는 불완전했고 사람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거룩한 형식을 갖추어 제사를 해도 여전히 부족해서 사람의 삶이 거듭나질 못했다. 지성소에서 드리는 대제사장의 제사는 거룩하게 드려졌지만 계획된 죄악, 악의를 품고 의도적으로 지은 죄는 속량할 수 없었다. 짐승제사의 한계, 사람제사장의 한계였다. 본문:9-10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과연 누가 무엇으로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로부터 온전히 구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찾아 영생복락의 은혜를 누리게 할까? 과연 누가 우리를 자유자 되게하며 생명이 되게 하며 과연 무엇이 우리를……형식과 예식이 아닌 실제의 제사는?
5. 예수님으로 세워진 제사는(11-15절):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을 헐어버리셨다. 사람이 만든 제사하는 장막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곧 성소와 지성소가 되셨다. 염소와 황소의 피로 더 이상 제사할 필요가 없게 만드셨다. 예수님 자신의 희생의 피로 영원한 속죄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회개하면 모든 죄로부터 씻김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예수 피는 사람들의 양심까지 변화시키고 삶을 개혁시키는 능력이 되도록 하셨다. 본문11-12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6. 그렇다면 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예법과 예수님의 제사 법을 비교하였을까? 왜 옛 것과 새것을 비교하였을까? :새 삶이 되어라. 먹는 것, 마시는 것에 합당한 삶이 되어라 함이다. 본문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삶이되어라!!!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 우리교회의 색깔, 성도들의 무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섬기는 우리은혜교회!!! 하나님께서 어떠한 마음으로 보고 계시겠는가? 학생부수련회중에 서부역에 나와서 하나님을 섬긴 우리 학생들!!! 이러한 모습이 예수사람의 모습, 이러한 섬김이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사는 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교회와 성도들을 세상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우리교회가 걷는 길이 복음적인 것을 알고서도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뭘까? 복음대로 사는 것이 부담되어서? 복음대로 사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그는 주님을 섬기는 참 성도일까?)
7. 사도바울의 믿음의 삶, 주님을 섬기는 삶: 가시밭길을 영광의 길처럼,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는 잔치 길처럼 걷지 않았는가? 사도행전14:19-22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
루스드라지방에서 복음전하다가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한 병자를 만나게 된다. 그의 마음에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명령한다. 그러자 그가 걷게 되었다. (바울과 실라를 향해 헤르메스와 제우스라 하며 제사를 하고자 하였다. 제사를 못하도록 겨우 말린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보고 계속해서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유대인들이었댜. 그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 지방에서 몰려들어 루스드라 지방의 사람들을 선동해서 돌로 쳐서 죽이도록 한 것이다.)
본문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