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세계의 모든 개신교회가 종교개혁주일로 드리는 주일예배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공표함으로써 시작됐다. 루터는 당시의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을 향하여 소리 높였습니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 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그때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 과연 종교개혁은 이루어졌습니까? 오늘 우리의 이 시대는 진실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 이 열매 맺는 시대입니까?
502년전의 마르틴 루터를 다시 역사의 무대에 세워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그 무대위로 나서야 할까요? 종교개혁의 시작은 바로 나 자신부터 이며 그 개혁은 주님 오실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2. 이제 오늘 본문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참으로 놀라운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니요. 영광의 그리스도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니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 눈으로 직접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럴 수 없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에 이르는 삶을 살지 않으면 곧 실천적인 삶으로 하나님자녀 됨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결단코 주님을 뵐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경고하신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0-21절) 는 말씀에 대한 입증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열매를 맺기는 맺되 먹을 수 없는 들포도를 맺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불에 태워지고 사람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면 하나님의 사람답게 화평함을 이루는 삶의 열매!!! 예수님의 제자이면 예수님의 제자답게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입니다.
3.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라”……그렇다면 우리성도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며 살아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2장 14-1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화목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우리인간에게 어떤 공로나 가치가 있어서 화평의 손을 내미신 것일까요? 인간이 선하면 얼마나 선하며 인간이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습니까? 선함 가운데도 악을 행하며 의롭다 하는 일을 하면서도 불의를 행하는 것이 인간존재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내미신 화평의 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무한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화평의 도구는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그 화평의 값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피였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피!!! 완전하고 절대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약속의 징표입니다.
4.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로 나오면 그는 하나님의 화평함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자녀 된 자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절)
오늘 우리는 그 전적인 은혜, 무한 은혜의 중심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며 살아야 할 절대적 근거요 사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막힌 담을 헐어버려야 할 증거요 사명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부모와 자녀가, 목사와 성도가, 성도와 성도가, 성도와 이웃이 모든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와 분쟁의 모든 담을 헐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화평의 도구 예수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5. 다시 본문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은혜는 완성된 것인 동시에 점차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이 회개함으로 주님께 나오면 하나님과의 은혜의 관계가 즉각적으로 그에게 열려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관계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는 시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완성된 것이지만 우리에게서는 아직입니다.
따라서 그 은혜의 관계를 믿음과 순종, 섬김과 충성, 헌신과 예배의 삶인 거룩함으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완성해 갈 때 하나님의 구원이 그에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다고 하는데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여전히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장로 집사라고 하는데 여전히 인격과 성품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힘있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로마서14장17절에서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대변되는 옛 것에 속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성화된 사람들의 나라이다라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들의 눈으로 주님을 뵈올 날이, 우리들의 손으로 주님의 손을 맞잡을 날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6. 이제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교회공동체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너와 내가 모여서 우리가 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서로 위로하며 도우며 세우며 섬기며 축복합니다. 형제가 낙심하여 있을 때, 눈물 흘릴 때, 연약해져 있을 때, 실패 했을 때 돕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일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의 친 가족처럼 서로 사랑하고 축복해야 할 관계가 바로 성도들의 관계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무슨 의미입니까?
혹 우리의 성도들 중 누군가 믿음이 연약해져서 뒷걸음 치고 있을 때, 혹은 세상으로 그 마음이 기울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 곧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그를 위해 힘써 기도하고 도우며 위로하며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교회의 성도님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하나님의 영생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제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아프겠습니까? 저의 소원은 여러분 모두가 이 땅에서 믿음승리를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저는 여러분의 손이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위로하는 손, 기쁨을 나누는 손, 생명으로 인도하는 손, 하나님의 은혜를 완성시켜가는 축복의 손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7. 다시 본문 15절 하반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각 교회공동체에는 영적인 숨결, 영적인 향기, 영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말씀의 교회는 영적인 숨결이 차분하고 평화롭되 힘이 있습니다. 기도의 교회는 영적인 향기가 향긋하고 곱습니다. 성령의 교회는 영적인 분위기가 생기가 넘치고 온화합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됨이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영적인 누룩이 말씀의 누룩, 기도의 누룩, 성령의 누룩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교회라고 해서 다 같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도 이미 아실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가보면 영적인 냉기가 흐릅니다. 영적인 악취가 나는 곳도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분위기가 무질서함으로 가득한 곳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그 교회의 목회자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들 중에 쓴 뿌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에서 살던 방식대로 교회 내에서도 동일하게 행동하는 것이 누룩처럼 번져있기 때문입니다.
8.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쓴 뿌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 29장 18-20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그렇습니다. 독초와 쑥의 쓴 뿌리는 바로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세상을 따르는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독초와 쓴 뿌리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사치와 자랑과 음란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즐기며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독초와 쓴 뿌리란 거듭나지 못한 완악한 마음입니다. 거듭나지 못했으니 교만합니다. 무정합니다. 인색합니다. 또한 독초와 쓴 뿌리란 한발은 하나님께 두고 한발은 세상에 걸치고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라 믿는 어리석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9. 여러분!
만일 이러한 독초와 쓴 뿌리 같은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힘주면 산다면 그 교회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교회 내에 사치 좋아하고 명품 자랑하는 사람들 있으면?) 다 타락해서 세상과 별반 차이 없는 곳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성도 여러분!
교회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서도 천상의 예배와 천상의 삶을 맛보도록 하신 하늘공동체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신앙의 향기와 믿음의 누룩이 다른 성도들에게 번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초 신자들 그리고 나중에 들어온 성도들은 먼저 믿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앞선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충성, 흠 없는 온전한 헌신을 하면 뒤에 온 성도들은 그렇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신실하고 온전한 신앙의 걸음이 나중 온 성도님들의 발걸음을 하나님나라로 인도하는 확연 선명한 흔적이 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