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생에 관심이 있는 한 부자청년의 방문과 질문입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16절)
세속적인 부자는 결코 던질 수 없는 질문을 품고 있던 부자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라고 모두 이 땅의 것에만 관심을 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영혼의 질문이었습니다. 영생!!! ……. 고 이병철 삼성그룹회장도 죽음을 앞둔 한달 시점에 “신(神)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가?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종교가 없어도, 종교가 달라도 착한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등 24가지의 영적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채 죽음너머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구원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열려있으나 그 은혜를 누구나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영생의 은혜를 누릴까?
2. 청년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절)였습니다. 이에 대해 모세의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청년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0절) 그러나 그가 지켰다는 계명들은 율법적이었나 삶으로 살아낸 신앙이었나? 즉 표면적이었나 이면적이었나? 형식적이었나 실제적이었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젊은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분명하고 단호했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절)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에 온전하고자 한다면 이 땅의 소유물을 따름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3. 과연 부자청년은 어떤 길을 선택할까? 소유일까? 진리와 생명일까? 종교적 삶일까? 삶으로 열매 맺는 신앙일까? 그러나 부자 청년은 소유를 택하였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께 오기도 어려웠는데 왔던 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으니 말입니다. 과연 청년이 택한 ‘되돌아간 부자의 길’은 그를 지켜줄 수 있을까? 진실로 어떤 것이 부요한 삶일까? 그리스도가 없는 부자의 삶일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난의 삶일까?... 오늘 우리는 어느 도상에 서있습니까?
4. 이제 계시록의 본문 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이 말씀가운데서 우리가 찾아내어야 할 아주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의 첫째는 “환난과 궁핍” 이라는 단어입니다. afflictions and poverty 고통과 빈곤…..여러분! “환난과 궁핍” 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의 마음에 던지는 파장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런 삶 싫어!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오직 평화와 부요를 원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삶! 누구나 멀리하고 싶은 삶! 그것이 환난과 궁핍, 고통과 빈곤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왜 이러한 삶에 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어려움을, 그들의 눈물을, 그들의 아픔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이 환난과 궁핍한 삶에 처하게 된 것은 그들이 무능했기 때문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도, 어리석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환난과 궁핍의 삶!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곧 남에게 떠밀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환난과 고통의 길로 나아간 것이요 자원한 궁핍과 빈곤의 삶이었습니다.’
5. 서머나는 당시 20여 만 명이 살던 큰 상업도시였습니다. 큰 상업도시였으니까 돈이 넘치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일자리도 남아돌았습니다. 언제든지 일할 수 있었고 넉넉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하나 때문에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웠고 심지어 일하던 곳으로부터도 쫓겨나야 했습니다. 설령 다시 일자리를 얻는다 하여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가장 험한 일을 하며 가장 적은 보수를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궁핍은 당연히 그들의 식탁이 되었고, 빈곤은 그들의 의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요!!! 예수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라고 만 하면 즉시로 좋은 일자리를 골라 풍요롭게 고급스럽게 그리고 재미나게 살 수 있었는데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6.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 성도들의 눈은 이미 그리스도의 가치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하여 온전히 열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보화를 발견했는데 잠시의 환난과 궁핍이 무슨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눈먼자들이나 보이는 세상의 소유를 따르느라 영원한 영광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17-18절)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향해 증명해준 분명한 사실하나:
1)사람들이 경제를 우상으로 여기며 살았는데 경제는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바벨탑이라는 것.
2)게다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돈으로는 이 환난의 시대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7. 이제 우리는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의 삶인 “환난과 궁핍” 이라는 단어가 어떤 단어와 만나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요함” 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부요한 자라! 넉넉한 자라! 넘치는 자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환난과 궁핍, 고통과 빈곤의 삶을 어찌 부요한 삶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한 이유로 환난이 숨결이 되고 가난이 식탁이 되어버린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진실로 부요하다.’ yet you are rich!!! 라고 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께 붙들린 삶이되었기 때문입니다.
8. 여러분!
예수는 누구입니까? 본문8절에서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증명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세상모든 것의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전능입니다. 또한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죽음의 운명인 인간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실 능력이십니다. 누가 부요한 사람입니까? 가진 것이 많으나 그리스도 없이 사는 세상사람들입니까?
아니면 환난과 궁핍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께 묶여 사는 성도입니까? 과연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님 오심이 날로 가까운 이 시대에 진실로 부요한 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원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6장 4-5절과 9-10절의 말씀을 봉독하며 오늘의 증언을 마치겠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