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1절: [창]23: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성경 66권 가운데 한 여성의 죽음과 그가 살았던 햇수를 기록한 것은 오늘 본문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라의 죽음을 통해 메시지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라가 누구인가?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일생을 동고동락한 열국의 어머니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고향과 친척과 본토와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때부터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가? - 뿌리 잘린 나무가 그 생명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가? 곧 죽음! 그러나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통로가 되었다. 비록 세상적인 뿌리인 고향과 친척으로 부터는 멀어졌을찌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고 쓰임 받았던 사라의 일생을 통해 우리는 다시 깨닫게 된다.
❋ [마]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
우리는 진실로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이라는 옛사람의 끈을 끊어 버렸는가? 만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마음에 세워둔 채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믿음이다. 하나님은 거짓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한발은 하나님께 다른 한쪽 발은 세상에 걸쳐놓고서 어찌 하나님의 나라에 다다를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단상을 세워야 한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단상을 세워둔 사람! 그의 영성과 삶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빛이 나겠는가? 이러한 복으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만일 사라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의 일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겨우 우상을 만들어 파는 시아버지와 함께 그 일을 거드는 일을 하며 일생을 보냈을 것이 아닌가? 얼마나 허무하며 무가치한 삶을 살았겠는가? 사람이 단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다움의 삶 곧 전능자를 만난 가치를 드러내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 죽으심으로 완전히 대속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간다면? 그리고 천국의 소망을 품지 못한 채 눈을 감게 된다면.....그 허무함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 모든 사람은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관에 눕게 된다. 가로 195㎝, 세로 56㎝, 높이 45㎝ 관안에 누운 인간존재를 한번 생각해보자)
❋ 사람에게 한 번 죽은 것은 필연이다. 아무리 건강하던 사람도 하나님께서 그 코에서 생기를 끊으시면 곧 썩어가는 존재로 변한다. 인생의 시간은 결코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사람들의 죽음 속에서 발견한다. 아무리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아도, 아무리 더 누리고 즐기고 싶어도, 아무리 더 돕고 축복하고 싶어도......... 집짓다가도 떠나고, 병든 아들을 돌보다가도 떠나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집안일을 고스란히 놔두고 떠난다. 떠난 그 뒷일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다. 남겨진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역이다. - 그런데 문제는 어떤 죽음의 메시지를 남겨진 사람들에게 남기는가? 하는 것이다. 껍질이 판치는 세상에서 알맹이를 추구한 삶이었는지? 껍질과 함께 같이 뒹굴다가 막을 내린 삶이었는지? 이 세상의 삶이 종점이 아닌 새로운 시점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가치는 얼마나 귀하며 위대하겠는가? 종점이 시점이요, 죽음이 새로운 시작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가운데 오셨다. 더욱 예수그리스도로 새로워지자. 그리하여 더욱 보배로운 삶이 되자!!!
❋ 시드기야는 이스라엘 유다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가 왕위에 나아간 때는 겨우 이십 일세였다. 어린나이에 왕이 되었으니 역대 왕들의 일대기를 살펴보고 성공과 실패의 이유를 깨닫고 자신에게 적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시드기야는 역대 왕들 중 실패한 이들을 따라가며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보시기에 악한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선지자를 보내셨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가르쳤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였다. 심지어 바벨론왕 느브갓네살 조차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계를 하였음에도 느브갓네살도 배반하고 더욱 마음을 강팍하게 하였다. 자신의 삶과 자리가 참으로 위태하였음에도 그는 깨달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셨기에 더욱 부지런히 사신들을 보내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돌아오기는커녕 하나님의 사신을 비웃고 조롱하며 메시지를 멸시하였다. 게다가 선지자들을 능욕하는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바벨론 느브갓네살왕에게 시드기야와 유다백성을 넘기셨다.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그의 눈앞에서 죽임 당했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놋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에 사로잡혀갔으며, 백성들은 칠십년간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다. 얼마나 참혹한 상황인가?-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이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죽음으로 소망의 메시지를 남기느냐? 세상에 속하여 육체로 마감하는 탄식의 메시지를 남기느냐? - 오늘 나와 여러분이 생을 다하고 남기게 될 메시지는 어떻게 기록되겠는가?
❋ 본문 1절-“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사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였을까? 아마도 이삭을 낳고 하루하루 자라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때였을 것이다. 낳을 수없는 아들을 낳고, 불가능한 일이 자신의 몸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때 사라는 장막 문 뒤에서 들으면서 속으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그랬던 그녀가 진실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그 기쁨, 그 행복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단순히 한 아들을 품에 안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열매를 안은 것이다. 이삭을 보면서 늘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하나님의 언약은 불변하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
❋[시]113: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모든 예배 속에서, 혹은 성경통독과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라. 여러분에게 임한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라의 죽음에 대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왜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에서 순종사건 그리고 부활의 아들이 되어 돌아온 이삭의 이야기 뒤에 갑작스러운 사라의 죽음소식을 전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 곧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성취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 [창]12: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12: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창]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시마하신 가나안땅에 대한 언약이다. 이삭에 대한 언약은 성취되었는데 가나안땅의 언약은 과연 어떻게 될까? 사라가 죽었으니 폐기 된 것일까? 만일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땅에 대한 언약이 폐기되지 않았다면 그 언약은 과연 어떻게 성취될까? - 극심한 가뭄사이로 구름을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반석에서 생수를 마시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켜 부요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사막에 길을 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세상 모든 일과 인생사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 -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던 하나님인가?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을 위해 친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며 믿고 따르라. 성경에 약속된 모든 언약들이 그 믿음을 따라 반드시 성취 되기 때문이다.
❋ 본문 2절: [창]23: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창]23: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창]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사라의 죽음은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크나큰 슬픔과 애통이 되었다. 진실로 사랑했고, 진실로 하나님께서 이끄신 길을 따라 동고동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슬픔과 애통에 침몰된 채 있을 수 없었다.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창]23: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뭔가를 하기로 결심하고 결정했다는 뜻이다. 가나안은 고온다습한 지역이었기에 시체가 급속히 부패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하면 24시간 안에 매장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할 땅 한 평이 없었다. 당대의 소문난 부자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본문 4절에서의 기록처럼 그는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로 살았다. 이방 땅 가나안에서의 삶이 합법적이기는 했으나 원주민은 아니었고 원주민이 아니었으니 결코 땅을 소유할 수 없었다. 언약 받은 가나안땅에 살았으나 그제까지 단 한 평도 소유하지 못한 채 살았던 그 땅에서 이제 뭔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4절: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사라의 매장지를 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매장할 곳을 겨우 마련한다 한들 언제쯤이나 가나안 땅이 그들의 소유가 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린 성도의 삶에는 우연은 없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필연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 -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사라를 매장할 땅을 통로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자손들이 거주할 가나안땅을 위해 친히 일을 벌이신다.
여호와 이레!!!
늘 준비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며 삶의 모든 일에서 그 영광을 거두는 나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