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11절: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 아버지의 행복과 꿈: 두 아들의 아버지.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꿈은 펼쳐진다. 아버지의 꿈은 아들들이 자신의 가르침과 뜻을 따라 잘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일군 가문과 기업을 유업으로 받아 더욱 풍부하게 가꾸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뜻과는 조금씩 다르게 성장함이 염려였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은 아버지께 근심과 염려거리가 아닌 기쁨과 행복을 더욱 높여드리는 삶이되길 바란다. 무엇으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
본문: 12-14절: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 작은아들의 꿈과 실패: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재산을 요구하는 아들의 성품은 불순종이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었다. 한마디로 불한당과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야만 받을 수 있는 재산을 어찌 생전에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세상에 대한 둘째 아들의 꿈: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을 따르는 육체적인 것이었다.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에 이끌려 화려하게 살고픈 것이 그의 꿈이었다. “허랑 방탕: wild living” 이라는 작은 아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과연 육체의 꿈과 자랑 그리고 육체의 영광은 영원할까?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은 “허랑 방탕: wild living”입니다. 허랑 방탕의 삶에는 오직 절망과 탄식과 죽음뿐 이라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이다.
본문:15-17절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작은 아들이 깨달은 세상의 실상과 아버지와 아버지 집의 복: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부유함이 넘치는 아버지의 아들에서 돼지 치는 자로 추락한 아들…….돼지를 치고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아들이 깨달은 세상의 실상은? ……’
1)얼마나 후회했을까? 세상은 어울릴 곳이 아닌 정복하고 다스리고 통치해야 할 곳이구나. 육체로 산 자의 마지막은 절망이요 죽음이로구나’……
2)죽음의 자리에서 발견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복: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가 진실로 내가 따라야 할 꿈이요 비전이었구나. 아버지께 모든 것이 있었구나.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들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로 아버지의 아버지 되심을 깨달았습니까? 아버지안에 머문 삶,아버지에게 묶인 삶이 얼마나 큰 은혜요 복인지......
본문: 20-24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 아버지의 큰 사랑: 무조건 적인 용서와 변함없으신 사랑: 어찌된 것이냐 따지지도묻지도 않는다, 가족 안에서의 아들 됨의 지위인 제일 좋은 옷, 가족으로의 회복과 권위의 증거인 가락지,종이 아닌 주인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는 신발이 아들에게 다시 부여된다.
❊ 십자가로 나타내신 우리를 위한 사랑: 우리는 그 영광의 은혜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능이 부여되어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위대한 사랑을 얼마나 깨닫고 그 사랑에 응답하며 사는가? 그 사랑에 삶으로 응답하며 사는 자가 돌아온 참 아들이다.
본문25-28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 큰 아들의 의와 방황: 한번도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아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께 항거한다. 성실한 것 같았으나 그 내면은 왜 아버지를 닮지 못했을까? 죽은 것 같았던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했는데 형은 왜 분노했을까? 더구나 아버지가 용서와 사랑으로 받으셨다면 아버지께 순종했어야 했는데……아들은 왜 동생의 지난 일을 다 들추어내며 아버지를 아프게 할까?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동생의 허물을 들추기보다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해드리는 아들이었다면 어떠했을까?
❊ 계속되는 아버지의 슬픔: 작은 아들은 탕자의 삶에서 회개하고 돌아왔는데 한 번도 집을 나간 적이 없다 하나 결코 아버지의 성품을 닮지 못한 큰 아들. 누가 탕자입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인격을 드러내는 삶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모양은 있는데 예수 믿는 성품의 능력, 인격의 힘이 없는 것은 아닌지요?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아들이 아닌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진실로 돌아온 아들, 진실로 회복된 아들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