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먼저 본문 1-2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수하다.’ 혹은 ‘흠이 없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과연 삭개오는 어떻게 해서 여리고지역의 관세청장이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어떻게 해서 부자라 불릴 만큼의 재산을 모으게 되었을까요? 과연 죄와 결탁하지 않고 순수하게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며 불의함 없이 부자라는 명부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요? 과연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처럼 순수하고 흠 없이 살아왔을까? 결코 그렇지않았다라는 것이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세리장까지 오르려면 로마의 권력가들과 결탁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으며 게다가 부자까지 되려면 불의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를 향해 허가 낸 도둑이라 불렀던 것인데 일반 세리도 아니고 세리의 장이 되었으니 그간 그는 얼마나 깊은 죄 가운데 살았을까요? 그 자신의 이름과는 정 반대되는 죽은 바 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과연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지위와 그 지위가 주는 권력으로 인해서 행복했을까? 또한 그렇게 가득 모은 재산으로 만족함을 누리며 즐거워했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 영혼의 기쁨과 만족은 세상권력과 재물로 가능할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진실로 행복하십니까? 만일 행복하다면 그 행복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대로 여러분이 불행하다 여기신다면 또한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함께 전도서와 고린도 후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3:5)”
누가 저와 여러분의 삶과 영혼에 구원이 되겠습니까?
2.이제 본문3-4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게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을 여리고 지역의 세무청장이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리장이 무엇이 아쉬워서 달음박질치며, 떵떵거리면 살던 부자가 무엇이 부족해서 체면도 없이 돌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가겠습니까?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렇습니다. 모든 체면 다 구기는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3절의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살펴보고자 한 때문입니다. 온 유대 땅에 두루 퍼진 소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었다는 거야! 글쎄 얼마 전에는 열명의 나병환자들을 치유하셨다잖아. 어디 그뿐이야! 소경이었던 사람도 다시 보게 해 주셨다잖아’
여기에서 우리는 마가복음 3장 8-10절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어떠한 존재였는지 말입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진실로 그렇습니다. 관세청장 삭개오가 돌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가 온 이스라엘 지경에 가득한 소문의 주인공 예수님을 직접보고자 했던 것은 그 내면에 소문의 실체!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힘쓰고 애를 써서 차지한 지위와 물질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해결 받고픈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다림을 지나 삶의 문제에 대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열망의 마음!!! 그것이 삭개오라는 한 사람을 세상의 부귀영화에서 내려와 돌감람나무에 오르게 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분이라면 예수님이라면! 그 분이라면 예수님이라면!!!
3.하나님의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주님께 대한 열망이 있습니까? 내 삶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에 대한 문제, 사업의 문제를 지나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허기에 대한 해결의 열망까지 말입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내가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이른 아침 깨어나 교회로 달려왔습니다. 나는 이 예배시간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믿음의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와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러한 열심과 열정이 있는 것은 예수님만이 내 영혼의 문제,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유일의 존재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하면 주님은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보고자 하는 열망, 나의 구세주로 만나고 싶은 열정 그리고 타인의 체험으로부터 들려진 소문의 예수님이 아니라 나에게서 체험 되어질 예수님에 대한 기다림으로 충만합니까?
4.본문5-6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렇습니다. 주님은 주를 향한 열정을 품고 주님이 오실 길목에 올라가 먼저 기다리는 사람에게 친히 응답하십니다. 믿음의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간 자를 바라보시고 그에게 함께하심의 은혜를 베푸시고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의 반전의 영광으로 기름 부으십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예수께서 주님 오실 길목을 향해 달음박질쳐서 미리 기다리던 나를 인정하시고 말씀하시되, 예수께서 ‘오늘은 내가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고야 말리라’ 하는 믿음 붙들고 나아온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시되” 그들이 만났던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만나고, 그들이 체험했던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체험하는 영광의 은혜가 우리성도님들 모두 위에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이제 본문 8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공개적인 회개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세리의 장에서 그리고 부자였던 삶에서 어찌 이젠 더 이상 부자가 아닌 삶으로 돌아설 수 있었을까? 소유의 절반을 나누고 그 나머지 재산도 율법보다 더 높은 비율의 네 갑절을 배상하는 일에 사용하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를 이전의 삶과는 정반대의 길로 나아가게 한 삶의 변화는 누구로부터 말미암은 것일까?
그렇습니다. 오직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존재를 깨달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만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진실로 예수님의 존재를 깨달았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만났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에 대한 증명은 무엇으로 할 것입니까? 삭개오와 같은 삶의 반전을 이루었습니까? 부자에서 평범한 자리로,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말입니다. 혹시 세상일에는 부요한데 하나님께는 인색하지 않습니까? 재산의 절반 아닌 삶의 전부를 주님께 드렸습니까?
6.물질을 어느 곳에 사용하는 가하는 것은 그 한 사람의 마음 중심을 알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고 하셨습니다. 옛 사람 곧 세상적인 사람은 이 세상을 따르고 닮아가는 일에 그 자신의 보물과 물질을 사용합니다. 마음과 눈에 드는 것이 있으면 그것 채우지 못해서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새 사람 곧 예수님을 삶의 그리스도로,영혼의 구주로 만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그 물질을 사용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모은 돈인데!!!”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단 한푼 쓰는 것도 아깝습니다. 그러나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존재인 자신을 알고 예수님의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더 많이 드리지 못함이 죄송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를 향한 그리스도 되심보다 앞서거나 높은 것은 결코 없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없는 인간존재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변화는 어느 정도 입니까? 예수님보다 앞서거나 높이거나 소중히 여기는 것이 없기를, 오직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 삶으로 이미 성숙되어 있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이제 본문9-10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가 이미 시작된 삭개오를 향한 예수님께서 베푸신 복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구원의 은혜가 삭개오와 그 집에 이르렀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친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 됨은 유대인이라는 출생증명서로 되는 것이 아닌 약속의 자녀 됨의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이 되는 것은 교회에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여 주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믿는 모양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움의 삶과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존재라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세상과 다름의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사람 되게,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예수 살! 예수 피를 먹고 마시니까 말입니다.
8.그렇습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자 다움의 삶으로 변화되면 구원은 성취되어 갑니다. 뿐만 아니라 나 한 사람의 변화는 그 가정전체에 구원의 은혜를 흐르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을 본받습니다.(삭개오의 변화는 그 가족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마음과 삶에 가져왔을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부모가 형식적인 신앙이면 자녀들에게서는 구원의 은혜를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내 부모에게서 만난 하나님을 내가 만남으로 신앙은 유전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는데 누구에게서 예수님을 만나겠습니까?
성도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삶과 신앙이 변화된 삭개오처럼 되어야 합니다. 극과 극으로의 변화!!! 그래야 이미 시작된 구원의 은혜가 자녀를 향해서 흐르게 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뿐만 아니라 나 한 사람이 온전한 예수 사람 되면 나로 말미암아 나의 가족을 넘어서서 이웃까지 아니 한 민족까지 구원에 이르는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찾으신바 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찾아야 할 주님의 아픔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