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위해 개 취급당하면서도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 라고 하며 끝까지 예수님께 긍휼의 은혜를 구했던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도대체 누구라고 여겼을까? 또한 오늘 소경은 ‘잠잠하지 못해? 소경인 주제에 왜 이리 시끄럽게 하는 거야!’ 라는 면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도 왜 가나안 여인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하기를 멈추지 않았을까? 소경에게 예수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그렇습니다.‘나의 문제의 해결은 오직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호와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로부터 보내신다 약속하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서의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진실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모든 문제로부터의 해결, 모든 고난으로부터의 구원, 모든 일에 능력이신 구세주입니까? 이에 대한 믿음으로 분명 확고합니까? 믿음은 어떤 주술이나 주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믿음은 곧 그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의가 됩니다.
로마서10장4절의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
2.본문 40-41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모든 것으로 부터의 구원이신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로 가까이 부르셨다는 이 사실 하나면 소경에게는 이미 하늘 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삶에 운명이 완전히 바뀌는 도상에 선 것처럼 말입니다. 소경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이미 하늘의 모든 은혜를 누릴 복된 자리에 들어와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셔서 성전의 뜰 안까지 들어오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난 받게 하기 위해서 일까요? 아니면 은혜 주시기 위함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로 초청하셨을까요? 괴롭히시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영생까지 상속받을 영광스런 복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일까요?
3.소경을 가까이 부르신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구별하여 가까이 부르신 것은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복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까지 선물로 주시려하심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랴?’ 솔로몬에게 물으셨고 소경에게도 물으신 분이 오늘 여러분에게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소경에게서의 유일의 소원은 돈도 명예도 세상의 권력도 아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유일의 소원은 무엇이어야겠습니까? 돈과 명예와 권력?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유일의 소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나를 위한 건강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건강! 나를 위한 자녀의 잘 됨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녀의 잘됨! 나의 자랑을 위한 부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부유함! 나를 높이기 위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기 위한 승리여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왜 구하고 있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4.소경에게 자동차를 주는 것은 복이 될까요? 화가 되겠습니까? 아직 영안이 열리지 않은 자에게 부귀영화를 주면 어떻게 될까요? 복이 되겠습니까? 화가 될까요? 영안이 열리지 않은 자에게 부귀영화는 곧 그 자신에게 심판이 되는 죄를 낳습니다. 예수 복음이 없는 자는 그 부귀영화로 그 자신을 타락시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을 유산을 미리 챙겨 떠난 탕자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손에 재물이 가득했지만 그 재물로 그는 그 자신을 위해 죽음의 구렁텅이를 만들어 가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재물이 먼저가 아니고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예수님이 먼저입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와 자랑이 우선이 아니고 그것을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인 복음이 우선입니다. 소경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나 그에게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더 못한 상태, 소경!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께 나아가는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결단코 어렵다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과 마음은 어느 나라에 속해있습니까?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는 이 세상 나라입니까? 아니면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세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이미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성도는 욕심에 지배당하지 않고 사명에 순종합니다. 만일 욕심에 지배당하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나라에서 아직 먼 자입니다.
5.이제 42절 말씀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너의 믿음이 너의 눈을 보게 하였다. Receive your sight………. see again”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의로움을 얻는 통로입니다. 믿음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시고 친히 그의 소원대로 그의 믿음대로 행하십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지나 이 소경과 같은 믿음이 있습니까? 사막과 같은 불가능의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받으시고 부족한 믿음일지라도 그것을 의롭게 여기심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하여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하시고 광야에 꽃이 피게 하십니다.
로마서 4장 18-24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진실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뿐만이 아닙니다. 소경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통한 의로움을 얻음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은혜와 복을 받을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 길을 걸을 자는 바로 오늘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시대에 그 믿음의 주인공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큰 믿음으로 견고하시기 바랍니다. 있으나마나 한 믿음 아니라 분명한 믿음, 흔들리는 믿음 아니라 확고한 믿음, 작은 믿음 아니라 태산 같은 믿음, 머리로 이해한 믿음 아니라 행하는 믿음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믿음을 의로 바꾸시는 율법의 마침이신 예수님을 통하여(롬10:4) 사막에 강이 흐름과 같은 은혜와 광야에 꽃이 피는 것 같은 복과 영광을 풍성히 거두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이제 43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열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로부터 긍휼의 은혜를 입어 저주의 병이라 불리는 죽음 이상의 고난에서 생명의 삶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열사람 중 단 한 사람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올렸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단 한 그 사람, 그 사람만이 은혜를 은혜 되게 한 것입니다. 치유함을 받고 세상으로 가지 않고 주님께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명은 새로 얻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예전에 살던 세상으로 다시 나아갔습니다. 은혜를 입었다면 은혜 입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을 받았다면 복 받은 자 다움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의미는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오늘 이 소경이 그렇습니다. 즉시 보게 되는 기적의 은혜를 입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 동안 못 보았던 것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었고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껏 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환하게 보이는 곳으로 나아가며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소경은 그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보게 된 눈으로 주님을 보게 되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큰 재물을 얻었으나 세상사람들처럼 이 땅의 것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더라. 물질 속에서 물질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으니까!!!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목에 힘주지 않고 더욱 겸손히 주님의 교회를 섬겼더라.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본 것이 아니라 높임을 주신 하나님을 보았기때문에!!!”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은혜와 복과 영광을 받고 도대체 어디로 나아갔습니까? 왜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은 못보고 얻게 된 복만 보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지위를 얻으며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자리입니까? 아니면 높이 올려주셨음에도,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주셨음에도, 배울 만큼 배웠음에도 예수그리스도의 자리로 다시 내려와 오직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자리입니까?
은혜를 주신 것은 은혜의 삶을 살라 하심입니다. 다시 보게 하여 주신 것은 밝은 눈으로 온전히 주님만 보며 따르라 하심입니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오늘 여러분의 영의 눈이 바라보는 삶의 방향은 어디입니까? 큰 은혜와 복을 받을지라도 그것 보지 않고 오직 예수, 오직 복음만 보게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