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67편6-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부요하게하시고 형통하게하시며 견고하게 하십니다.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없는 부자가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부자 그들의 길은 곧 망하는 길이요,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시편73편 17-18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부자, 하나님 밖의 명예와 권세를 누리던 사람들의 결국을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곧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때에 밝히 보게 될 것입니다. 파멸 이라! Ruin! 영원한 파멸이라! 이래도 세상을 부러워하겠습니까? 이래도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겠습니까?
* 지난 화요일 제 9년차 방한복 나누기 사역을 은혜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이 일을 위해 힘써 헌금하여 주시고 거리에까지 직접 나오셔서 헌신하여 주신 성도님들께 주님의 위로와 기쁨과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4- 40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들려주시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러분은 세상을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더욱 힘써 예수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이 말씀가운데서 우리가 찾아 내어야할 아주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로는 “환난과 궁핍” 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이 환난과 궁핍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 여러분! “환난과 궁핍” 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의 마음에 던져주는 파장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런 단어는 듣기조차 싫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이 환난의 삶, 궁핍한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누구나 피하고 싶은 삶! 누구나 멀리하고 싶은 삶! 그것이 환난과 궁핍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능했기 때문도, 배우지 못해서도, 어리석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환난과 궁핍의 삶!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때문이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곧 남에게 떠밀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환난과 고난이요, 의지적인 가난함과 궁핍이었던 것입니다.
* 서머나는 당시 20여 만 명이 살던 큰 상업도시였습니다. 일자리가 남아돌았습니다. 돈이 넘치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때문에 일자리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설령 다시 일자리를 얻는다 하여도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험한 일을 하며 가장 적은 보수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빈곤은 그들의 식탁이 되었고, 가난함은 그들의 의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여전히 자신이 그리스도인 인 것을 결코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라고만 하면 물질적으로 수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능력에 따라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남부럽지 않은 것을 먹고 입으며 마시며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결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 그리스도만 담긴 열린 눈이여!!! 아! 영생을 품은 보배로운 심령이여!!!
* 그런데 이제 우리는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의 삶인 “환난과 궁핍” 이라는 단어가 어떤 단어와 만나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요함” 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부요한 자라! 넉넉한 자라! 넘치는 자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환난과 궁핍이라는 비참한 단어가 어찌 부요함 이라는 보배로움으로 바뀔 수 있습니까? 가난이 식탁이 되어버린 서머나 교회의 성도를 어찌 부요하다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이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고난을 견뎌낸 이유! 가난함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힘! 환난가운데서도 여전히 인내했던 이유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처음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이 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죽을 때까지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처절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로 사람들을 영원히 살게 하시는 영생이십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바로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랐고 그 믿음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부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서 증언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지난 주,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한 성도님 가정이 한 달 월급 전부를 추수감사예물로 드렸습니다. 한 달 치 월급이니까 얼마나 크고 귀한 물질이겠습니까? 제가 매 주일 헌금 봉투에 적힌 감사 제목, 기도 제목을 보면서 기도합니다. 이미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예물이지만 이어서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차근히 감사제목, 기도제목을 보면서 한 달 월급 전부를 추수감사 예물로 드린 그 가정의 믿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그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더라면 .......... 만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 만일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없다면 ........ 만일 영적인 삶에는 눈이 열리지 못하고 자신의 육체의 삶에만 골몰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부요하면 하나님께는 가난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은 더욱 부요하게 됩니다. 부요함이란 손에 쥐고 있는 것, 쌓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손에 쥔 것을 흘려보내지 못하면, 쌓아놓은 것을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욕심이요, 집착이요, 억압이요 어리석음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라도 가난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요란 하나님께 드릴 줄 아는 영성입니다. 참된 풍요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드릴 줄 아는 영성! 나눌 줄 아는 영성! 섬기 줄 아는 영성! 그것이 바로 부요함이요, 자유요, 강건함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곳에 임재하십니다.
*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의 자리에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 때문에 환난과 궁핍가운데 있으나 하나님의 부요를 누리는 삶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육체의 삶에는 부요하나 여전히 허기져있는 가난한 삶의 자리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성취해 가야할 신앙의 실제입니다. 이제 우리함께 이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계2:9)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 이제 우리는 본문 9절에서 다시 우리의 심장을 향하여 화살처럼 꽂혀지는 단어를 찾아 야만 합니다. 그것은 “자칭 유대인” 이라는 단어와 “사단의 회당” 이라는 단어입니다.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당이라”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유대인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운데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친 백성, 선민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가운데 유일하게 구별된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 사랑받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에게 “사단의 회당” 이라는 참혹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 “유대인과 사단의 회당” 이것은 극과 극의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사랑과 미움,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 그 이상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칭 유대인들을 향하여 “사단의 무리” 라고 엄위하게 지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친 백성의 자리에서 “사단의 회당” 이라는 저주스럽고 모독적인 자리로 추락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메시아를 깨닫지도 못하고 거부하고 썩은 무덤 같은 삶을 살면서도 유대인이라는 껍데기만을 두른 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따르는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의 삶을 방해하고 그들을 환난가운데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어느 자리에 서있는지!!! 혹 우리는 자칭 유대인처럼 자칭 성도, 자칭 크리스천, 자칭 목사로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 선택하심만을 믿고서 예수님의 십자가지기를 거부하며 살고 있지 않는지?.......... 회칠한 무덤 같은 삶,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주여! 주여! 라고만 외치지는 않는지?..........심각히 우리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도라고 여기고 사는 우리에게 “네가 사단의 회당이라” 지목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드려볼까요? 한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한 목사님이 같은 교단에 속한 다른 목사님이 안식년을 마치고 그 선교지로 다시 나와서 사역하려는 것에 대하여 그가 속한 교단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00 목사님을 우리지역의 선교사로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일을 돕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교사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타교단의 목회자를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우리지역의 선교사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편지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이 편지로 인해서 다시 선교지로 나와 사역하려던 목사님은 발이 묶였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편지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을 돕지 않는다고 다른 선교사의 걸음을 방해합니다. 그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무엇을 도우라는 말입니까? 적당히 선교하는 것을 도우라는 것입니까? 또한 선교사회의에 나오지 않는다고 그것을 이유 삼았습니다. 이유가 됩니까? 선교사회가 선교지에서 도대체 왜 필요한 것입니까? 선교사로 나왔으면 열심히 선교만하면 되지, 모여서 무엇 하는 것입니까? 선교지에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타교단목회자를 돕는다고 그것으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 합니다. 선교사는 어찌하던지 현지인목회자와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역자의 길을 방해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선교의 일에 나서야 하는 이 막중한 시대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진정 선교에 열심 내는 사람이 이런 편지를 쓸 겨를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들이 선교지에서 없을까요? 헝가리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 대통령 아니라 그 누구라 할지라도 주님의 일을 방해하면 사단이 됩니다.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지 않으면 사단이 됩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저는 어떤 존재입니까? 자칭 성도, 자칭크리스천, 자칭사역자로 살고 있으나 실상은 사단으로 지목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성도의 일을 성취해야 합니다. 외롭고 고단할지라도 세우신 사명자의 삶을 살아야만합니다.
본문 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렇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유대인이 아닙니다. 성도라는 겉모양만 있다고 해서 성도가 아닙니다. 목사, 선교사는 무늬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늬는 목사인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다른 사역자의 길에 올무를 놓는다면 주님께서 그를 향하여 무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새 삶을 살게 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두 눈엔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보여야 합니다. 성도들의 심장은 신체적인 장기의 심장이 아니라 “죽도록 충성” 이라는 “사명의 심장” 으로 뛰고 있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사명의 심장” 이 뛰고 있는 사람에게 무엇이 장애가 되겠습니까? 가난함이 그 심장을 멈추게 할 것입니까? 아니면 환난이 그의 심장을 멈추게 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죽음도 결코 그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신체적 장기의 심장을 죽도록 충성이라는 사명의 심장으로 이식받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와 역사 앞에 다시 세움을 입는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처럼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다음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네게 주리라” (계2: 10)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