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의 적인 법률가에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 확신으로 오직 말씀에 입각한 복음을 전하면서 약 50만 명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던 찰스 피니 목사는 “아무도 회심시키지 못하는 7가지 설교 방법”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설교의 동기를 죄인을 구원하는 것보다 인기를 얻는 것에 두라.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보다 청중을 기쁘게 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 연구하라. 3. 사람을 많이 모으기 위해 대중적이고 일시적이며 선풍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주제를 택하라. 4. 죄를 추상적으로 비난하라. 그리고 당신의 회중 안에 유포된 죄들을 가볍게 지나가라. 5. 덕의 사랑스러움과 천국의 영광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죄의 죄 됨에 대해서는 설교하지 말라. 6. 결석한 자의 죄만 책망하고 출석한 자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하도록 만들어서 그들이 설교를 즐기게 하고 마음이 상해서 돌아가게 하지 말라. 7. 세상적인 교인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선하시기 때문에 설사 지옥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지옥에 보내시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라
2. 그렇습니다. 진리의 산을 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요 험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리는 길입니다. 또한 그 길에 오른 소수의 사람들도 힘들고 어려워서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오르고 또 오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을 어떻습니까? 정녕 ‘죽으면 죽으리라’ 는 ‘일사각오’ 의 신앙 맞습니까? 진리의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그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타협이 없는 길이며, 외로운 길이며, 핍박과 조롱이 쏟아지는 길입니다. 또한 잠시도 느슨해 질 수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눈물 없이는 갈 수 없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갈 수없는 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서 있는 신앙의 도상은 어떻습니까? 분명 그리스도의 도상에 서있습니까?
3. 오늘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서 먼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하는 말씀에 초점을 두어야겠습니다. 이 말씀은 버가모교회와 그 성도들이 처해있는 상황, 그리고 그 지역의 영적상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버가모는 “사단의 위, 왕좌가 있는 곳이라.” 한 것처럼 세상의 왕을 신처럼 섬기는 황제 숭배의 본거지였습니다. 또한 제우스 신전, 뱀을 신으로 섬기는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을 비롯한 여러 신전이 세워져서 우상 숭배가 가득했던 곳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혼돈이요, 무질서요, 어두움으로 가득 찼던 곳이 바로 버가모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충성된 예수의 사람이었던 안디바가 참혹한 죽음에 처해지는 극한 위협 속에서도 여전히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혼돈가운데 뚜렷한 질서였습니다. 극한 어두움가운데 눈부신 선명함이었습니다. 어찌 그 위협과 혼돈과 죽음을 넘어섰는지 말입니다.
아!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여! 그 비밀을 알려주시오!!! 이김의 비밀! 넘어섬의 능력!
4.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너 계속해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면 직장에서 내 쫓아버리겠다. 네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하면 창과 칼로 죽이겠다.” 라고 위협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예수 믿는다고 매를 맞고 참수를 당한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극한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겠습니까? 포기하고 다 도망가지 않을까요? 우리의 육체의 힘! 인간적인 의지는 그 벽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십자가를 지신 이름, 부활의 이름, 승리의 이름, 영생의 이름, 예수그리스도를 부르면 그 이름의 능력이 우리 연약한 육체를 다스립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에 힘과 능력을 끊임없이 불어 넣어 줍니다. 그리하여 넘지 못할 것들을 넘어서게 합니다. 가난도, 환란도, 절망도, 두려움도, 눈물도, 죽음도 모두 넘어서게 하는 구원하는 능력이 됩니다.
5. 빌립보서 2장 9-11절에서 이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도, 땅에 있는 것도, 땅 아래 있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 영광의 이름의 능력은 오늘 날에도 그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의 삶에서 능력과 권세로 역사합니다.
형제 자매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버가모를 둘러싸고 있던 영적 어두움이 고스란히 깔린 환경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그 시대보다도 더 강력한 사단의 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대와 환경을 이기고 믿음의 위대한 빛을 발할 능력은 과연 무엇입니까?
6.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삶의 모든 자리에서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절망가운데서 소망이 되시며, 막힘 가운데서 형통함이 되시는 그 은혜의 이름! 가난함 가운데서 부요가 되시며, 약함 가운데서 강함이 되시는 그 능력의 이름! 두려움 가운데서 용기가 되게 하시며 죽음 가운데서 생명이 되시는 그 영광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 그 능력, 그 영광을 결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7. 이제 우리는 본문 14-15절의 말씀으로 걸음을 옮겨야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우리는 이 본문가운데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 이라는 단어에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발람의 교훈은 무엇이고 니골라당의 교훈은 무엇이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던 위대한 믿음을 지녔던 버가모교회가 왜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책망을 듣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8. 발람의 교훈이란 민수기 22장-25장 사이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가나안을 향하여 거침없이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위력 앞에 “소가 밭의 풀을 뜯어 먹음같이 자신들을 다 삼킬 것이다.”(민22:4) 라고 하면서 심한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부돌의 아들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미 가나안 땅을 선물 받도록 복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세력도 그들의 길을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발람은 돈 앞에 쩔쩔매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 발락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묘한 속임수를 넣어서 이스라엘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모압의 여인들과 행음하도록 하였습니다.(민25:1-3)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한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까 발람의 교훈이란 물질주의, 혼합주의,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지적인 것입니다. 물질을 따르고 높이는 교회!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이 주실 것을 더 찾도록 하는 세속화된 교회! 그것이 바로 발람의 교훈인 것입니다.
9. 또한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백성을 정복한다.’ 라는 이름을 가진 니골라에 의해서 시작된 무리의 교리였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교훈이란 “한 번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다. 따라서 육체로 범죄 해도 그 범죄로 인하여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는 것이었습니다. 곧, 죄에 대하여, 바른 신앙에 대하여 느슨하게 만들어 육체로 점점타락하게 만드는 이단적교리였던 것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그렇습니다. 물과 기름은 섞일 수도 없고 섞여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길로만 가야합니다. 세상이 변한다고 교회까지 변할 수는 없습니다. 참신앙의 길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타협은 안 됩니다. 타협하는 신앙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0.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어떤지 말입니다.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이 가득한 것이 이 시대의 교회 상황 아닙니까? 강단에서 쏟아지는 설교들의 대부분은 어떤 내용입니까? 또한 좁은 길로 가고자하는 성도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세상은 변화하는데 교회는 왜 고집불통처럼 구식을 고집하느냐? 그것은 시대를 읽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라고 하면서 뚜렷한 구분, 선명한 색깔을 잃어버린 어정쩡한 교회가 우리들의 교회 아닌가 말입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구원을 얻는 길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각자의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라는 그릇된 것을 받아들이는 혼합적인 행음하는 교회가 이 시대의 교회가 아닌가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별반 차이 없는 물질만능, 성공주의를 따르는 교회가 우리들의 교회가 아닌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11. 엊그제 한국 기독교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또 하나 들렸습니다. 그것은 판교에 있는 한 장로교회가 500억 원을 넘게 들여 교회를 건축하였는데 무리한 건축으로 결국 법원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처음경매가액은 526억 원이었는데 누구도 나서지 않아서 경매는 계속 유찰이 되었고 경매가액은 더불어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9월 1일, 단독 경매가 붙여졌고 본래 경매가액의 절반이 조금 넘는 288억 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교회로서는 엄청난 손해를 입은 것입니다. 교회를 왜 이렇게 크게 지었을까? 꼭 그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교회를 건축해야만 했을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지난 11월 21일, 교회를 낙찰 받는 사람들은 경매잔금을 완전히 치르면서 그 교회의 소유권을 넘겨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유권을 거머쥔 사람들이 누군 줄 아십니까? 그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교회’ 라는 사이비이단종교였습니다. 성도들이 피땀 흘려서 자신도 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정성들여 헌금한 것이 결국은 말도 되지 않는 이단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만일 500억 원이 넘는 물질 중에 반은 교회 건축하는 곳에 사용하고 나머지 반은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먹이고 입히는 일에 사용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애매히 고난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까? 애매하게 고난 받는 것이라면 상급이요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잘못뿌리고, 잘못심어서 거두는 것이라면 그것은 심판이요, 멸망입니다.
12. 우리는 이번 주일부터 4주간 동안 예수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로 지킵니다. 강림절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를 향하는 우리의 기다림은 어떤가?” 하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일평생 경건하고 의롭게 살다가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품에 안고 감격에 겨워 찬송하였던 시므온처럼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앙이라면 어떨까요?(눅2: 25-35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 앞에 그 믿음과 신앙이 꺾이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승리할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아기예수님을 품에 안았던 시므온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의 선물을 품에 안게 될 것입니다. 감추었던 만나, 영원한 양식!......... 흰 돌, 예수그리스도의 잔치에 들어갈 표를 말입니다.
* 오늘 본문 17 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