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인생, 그리고 그 인생의 길이는 흘러가는 구름, 굴뚝에서 나와 금 새 사라져버리는 연기, 아침 이슬처럼 잠깐입니다. 그 완전할 수 없고, 허무한 인생들에게 가장 완전한 보물, 가장 영광스러운 보배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 후서 7장 6-7절에서 증언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깨지기 쉽고 상하기 쉬운 질그릇 같은 우리인생들의 보배이십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 품은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게 하는(고후4:8-9) 생명과 능력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을 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2.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며 인내의 신앙으로 살았지만 어느 샌가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 교회가 되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견디기 어려운 환란과 궁핍가운데 있었으나 실상은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죽음의 위협가운데서도 굳게 그 믿음을 지켰으나 어느새 세속주의와 타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두아디라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일까요? 그리스도께서 두아디아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이제 함께 두아디라 교회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 보겠습니다.
3. 먼저 본문 1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어떻습니까? 참으로 대단하고 칭찬받을만한 교회 아니겠습니까? 선한 사업과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가 가득했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다 갖춘 교회였습니다. 인내는 소망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섬기는 일에도 칭찬들을 정도였으니까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을 몸과 마음을 다해 실천하는 살아있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4. 한번 생각해 볼까요? 오늘 날, 성도들의 신앙의 현 주소는 과연 어떻습니까? 흔히들 말하지 않습니까? “머리에는 가득한데 행함은 없다. 오늘날의 신자는 가분수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 성경과 교회에 대해서 지식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는데 몸으로는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듣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아는바, 들은바,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균형 잡힌 교회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나중행위가 처음 것 보다 많도다.” 하신 예수님의 칭찬처럼 그들의 행함의 신앙은 수그러들지 않고 점점 왕성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언하는 일에 두아디라 교회처럼 행하자는 것입니다. 선한사업과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의 행동하는 신앙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우리가운데 가득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이제 우리는 본문 20-21절의 말씀으로 우리의 걸음을 옮겨야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도다.” 우리는 이 말씀가운데서 심한 충격과 함께 참으로 비통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선한 사업과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로 가득한 실천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던 교회가 어찌해서, 무슨 이유로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행음하는 참혹한 죄악가운데 서게 되었는지.......게다가 회개할 기회마저도 거부하는 참람한 성도가 되었는지 말입니다. “너! 간사하고 간교한 사단아!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는 멸망을 당할 지라!”
6. 두아디라는 당시 교통의 요지로써 상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옷감을 짜고 염색을 하며 도자기 산업 등이 발달했는데 이에 따른 동업조합들이 많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업조합은 자신들만이 섬기는 각각의 수호신이 있었습니다. 당시 두아디라의 사회상황은 누군가 사업에 성공하고 싶거나, 부요하게 살고 싶거나, 출세를 하려면 반드시 그 동업조합 곧 길드에 가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합원이 되려면 그 조합의 수호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즉, 조합에서 행하는 갖가지 제사에 참여를 해야 했습니다. 또한 제사의식이 마쳐지면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은 신이 내린 선물로 여기고 감사히 먹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제사의 또 다른 한 예식인 그 신전에 고용된 여자들과 풍요와 다산의 의미를 담고 있고, 사업의 풍요를 비는 음행 의식에 참여를 해야 했습니다. 바알을 신으로 섬기는 이방인들의 풍습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참으로 생각만 해도 불결하고 역겹고 소름이 돋는 일 아닙니까?
7. 세상 사람들이야 이러한 일들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오히려 육체도 즐겁게 하고, 출세도 하며, 돈도 버는 일거양득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이 성공과 출세, 탐욕과 쾌락을 찾아 나서는 모양들을 보십시오. 정치인들의 성 대접, 사업가들의 성 상납 등이 바로 그런 일들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며 육체를 즐겁게 하는 일을 끊고 탐욕을 제어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일들은 결코 용납될 수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사업을 안 할 수도, 출세를 그만 둘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랴? 하늘이냐? 땅이냐? 영원인가? 순간인가? 참으로 큰 숙제였습니다.
8. 그런데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두아디라 교회내의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자칭 선지자로 불리던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그럴듯한 해결 방법을 제시합니다. ‘여러분! 사단을 이기려면 사단을 잘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죄가 어떤 것인지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고는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단의 은밀한 일들을 배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논리 아니겠습니까? 사자의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물려봐야 알고, 마약에 중독되지 않으려면 마약을 먹어봐야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않으려면 술을 마셔봐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넘어졌을까요? 그들은 다름 아닌 마음을 두 쪽으로 나누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쪽은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고 다른 한쪽은 세상을 향하여 나누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두 마음을 품고 살면 그 기울기는 자기상황에 따라 늘 변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진리는 들리지 않고 생명의 길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절과 5-6절에서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9. 그렇습니다. 사단은 천사를 가장하고 들어옵니다. 이단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위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 뒤에 감춰진 것은 사자의 이빨보다 더욱 날카로운 이빨입니다. 그래서 걸려들기만 하면 인정사정 형편 헤아리지 않고 다 찢어 만신창이가 되게 합니다.(풀뱀 예화: 골프장에서 남자들을 유혹하고.......수천, 수억을 가로채 달아나는 신종사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과연 우리의 구원은 어디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숱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할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갈리지 않는 마음, 쪼개지지 않는 마음, 찢어도 찢겨지지 않는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구원의 영광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서 권고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it is the wellspring of life.”
10. 이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초점을 본문 23절로 옮기고자 합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어떻습니까? 이 구절의 말씀이 좀 무섭고 두렵게 들리지 않습니까?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세상 것을 얻고자 믿음을 저버린 자, 조금 더 높은 자리, 편안한 삶, 풍요로운 삶을 살겠다고 영혼을 팔아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죽음과 저주가 쏟아 내리는 형벌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1. 그런데 제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말씀은 그 말씀보다도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라”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뜻이란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하신 말씀에서 깨닫는 것처럼 은유적으로 사람전체를 가리킵니다. 한 사람이 그 자신의 마음에 품은 것과 세운 뜻이 곧 그 사람 전체를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과 뜻이란 우리 인간에 대한 은유로써 육체적 삶에 중심이며(고후3:2-3) 영적 삶에 중심(눅16:15,롬6:17)이 됩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생각의 중심이 되며(고후4:6) 의지와 감정의 중심이 됩니다. 또한 마음은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고 말씀한 것처럼 성령님이 일하시는 독특한 영역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품는 마음과 세우는 뜻이 곧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품은 마음과 세운 뜻에 따라 그 인생의 운명이 결정이 됩니다. 승리냐 실패냐? 생명이냐 죽음이냐? 영원이냐 순간이냐?
12.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형제자매여러분!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은 왜 넘어졌을까요? 그리고 오늘 여러분과 제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 하나님도 얻고 세상도 얻겠다는 나누어진 마음, 찢어진 마음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품고 있는 그 마음 때문에 빛난 눈을 가지시고 주석 같은 발을 가지신 하나님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세운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영광되게 하는 그 외에 또 다른 뜻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즉시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살고,........ 그래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열매 맺고,......... 그래야 승리한 사람에게 주시는 새벽별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갈린 마음, 나누어진 마음으로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제 본문 26절과 28절의 말씀을 우리들의 심장에 다시 새겨 넣겠습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