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데는 당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도시는 견고했고 크고 부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유한 생활,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예민하지 못했습니다. 보이는 것, 손에 쥔 것이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풍조는 사데 교회 내에도 들어와서 성도들의 영성을 좀먹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함, 풍요로움이 좋아 보여도 사실 그것에 매이기 시작하면 그때는 서서히 죽어가는 존재가 됩니다. 소유한 것 그리고 누리고 있는 것이 진짜 자기 자신인줄 착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대한항공부사장)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막10:23).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보이는 세상을 따라가는 죽어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보이지 않으나 영원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생명의 사람입니까?
2.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의 완전한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하여 엄한 책망을 하십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참으로 충격적인 책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러한 책망보다 더 심한 책망이 있을까요? 있으나 마나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 정도 신앙이면 괜찮지 않겠어? 우리들의 이 헌신과 충성을 좀 봐! 이 사랑과 섬김은 어떻고! 또한 우리가 힘써 드린 헌금으로 세운 이 교회를 봐! 감히 누가 이렇게 헌신할 수 있겠어? 또한 우리들의 금식과 열정적인 기도는 어떻고!!!”
3. 그렇습니다. 어쩌면 사데 교회는 선한 사업,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의 표상이었던 두아디라교회에 못지않은 행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 평토장한 무덤 같은......... 겉은 화려한데 속에는 썩은 것들로 가득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야단하신 것처럼 사데 교회역시도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내면의 영성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보이기 위한 행위, 나타내고자 함, 드러내고자 함, 뽐내고자 함, 자랑하고자 함의 하나님의 영광과 거리가 먼 죽은 행위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데 교회성도들의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을 본문 2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4.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데 교회의 신앙적인 행위가 하나님보시기에 온전하지 못했다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자랑이 아닌 자기자랑을 위한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데 교회의 온전하지 못한 행위는 이사야서 29장 13절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아! 마음이여! 마음이여! 중심이여!’
형제자매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의 행위의 안목은 오직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내 생각, 내 자랑, 내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여기실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무엇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될까? 혹시, 이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을까?” 우리자신을 하나님께 일치시켜 행해야 합니다.
5. 오늘 우리는 10년 20년 혹은 30년 50년 이상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데 교회와 같은 책망을 듣게 된다면 과연 어떨까요? “산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사람보기에는 그럴듯하여 칭찬 들을 만한데 정작 하나님께는 인정할 받을 만한 것이 없는 신앙이라면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것처럼,..... 은혜 안에서 사는 것처럼 보여 지는데.......... 일상의 삶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거나 더 세속적이라면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 분 앞에 뭐라 항변하며 무엇이라 변명할 수 있을까요? 장 칼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자기의 거룩한 삶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성도는 신앙의 거룩함을 따라 삶도 거룩해야 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6. 이제 우리는 본문 3절의 말씀으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 즉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비와 긍휼을 들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이미 영적으로 죽어서 희망 둘 가치가 없는 존재라면 그냥 내버리시면 될 텐데........... 행위가 너무 가증하여 역겨우시면 그냥 그렇게 살다가 망하도록 버려두면 될 텐데........ 천지의 주재이신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 다시금 그 거룩한 손을 내미시는지 말입니다. 항거하고 대적하고 반항을 일삼는 흙덩어리가 무엇이라고 그 빛난 손을 내미셔서 은혜를 누릴 기회를 주시는지 말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2-23절에서 증언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권면처럼 우리가 어떻게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사랑으로 오셨는지? 깨닫고 회개하여 그 첫사랑, 첫 마음, 처음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7. 거리전도 찬양집회를 하면서 저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른 막대기 같은 제가 감히 순종하며 나아가니까 하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십니다. 그중에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거의 매번 경험하는 것이지만 지난 화요일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에게서 경험된 일입니다. 저는 주님의 복음을 전한 뒤, 감동이 오는 사람들에게 영접기도를 해 주거나 영접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그 영접 기도를 따라 하던 사람이나 혹은 영접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듣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이제 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 안에 임재 하여 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그러는 사이에 눈물이 솟구치는 이 일을 어찌 설명할 것입니까? 채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기도, 바람이 부는 광장, 사람들의 이목이 의식되는 곳임에도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사로잡아 그들로 신비의 눈물이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존재, 수많은 고난과 아픔과 실패 속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 그리고 죽음의 진노 아래 살아가는 존재에게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다가오십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의지의 대상으로, 평안의 대상으로, 안식의 존재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 설명할 수 없음입니다.
8. 형제자매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던 그날의 감동과 다짐을 기억하십니까? 또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처음으로 경험하던 날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의 모든 풍조가 다 변하여도 또한 우리의 삶의 자리와 형편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입니다.
이사야서 57장 15절에서 증언합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 ‘돌아오라! 돌아오라! 회개하여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리하여 다시 생명이 될지라.’
9. 이제 본문 4절의 말씀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 기쁨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그렇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외식의 도시, 쾌락과 부요와 물질의 풍요를 자랑하던 죽음의 사회 속에서 그들과 혼합되지 않은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좁고 험한 길을 향해서 여전히 빛나게 걸어가던 소수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어리석다’ 손가락질 받았겠지요. ‘세상을 모르는 바보라’ 놀림 당했겠지요. ‘융통성이 없는 막힌 사람이라’ 조롱당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로 외길 걷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사51:7)
10. ‘남은 사람’ 이란 모든 시대와 풍조와 환란 속에서도 더럽혀 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남은자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자신의 길을 삼고, 자신의 양식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굶주려도 배고프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는 자였습니다. 버림받은 자 같았으나 남겨진 자였습니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는 합당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남겨진 자들을 다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씨앗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11. 선명한 의로 살았던 노아가 그리고 그의 가족이 남은 자였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며, 바랄 수없는 중에도 믿음의 길로 나아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 남은 자였습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 삶의 중심을 두고 살았던 다윗이 남겨진 자였습니다. 절대 신앙, 절대 충성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남은 자였습니다. 바알에게 무릎 끓지 않았던 칠천의 용사들이 남은 자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과 신앙은 어떻습니까? 살았으나 죽은 자의 자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남은 자의 자리에 있습니까?
12. 사도 바울이 외칩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9:27) 형제자매여러분!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면과 외면이, 마음과 행위가 오직 그리스도로 일치하는 생명의 삶을 살아,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로 승리한 사람에게 입혀지는 흰옷을 입고 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