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코럴릿지 교회의 담임목사님인 툴리안 차비진이 쓴 ‘Jesus All’ 이라는 책에서 읽은 간증입니다. 간증의 주인공은 조셉이라는 아프리카 마사이 족 전사입니다. 무덥고 지저분한 아프리카의 도로를 걷던 중 조셉은 누군가를 만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성령의 능력이 그의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기쁨에 겨워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부족 사람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셉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구원에 관해 힘을 다해 증언하였습니다.
*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사람들의 얼굴이 밝고 환해질 줄 알았는데 웬걸 동네 사람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력적으로 변하였습니다. 마을의 남자들이 조셉을 붙잡아 넘어뜨린 뒤에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여인들이 가시가 박힌 채찍으로 그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셉을 마을 밖으로 끌고나가 숲속에서 혼자 죽게 내 버려두었습니다. 얼마 만에 조셉은 겨우 물웅덩이까지 기어갔고 거기서 몇 칠 동안 의식이 오락가락한 끝에 겨우 일어날 힘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평생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난폭한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조셉은 아무래도 자신이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뭔가를 빠뜨리거나 잘못 전한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들었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새긴 뒤에 마을로 돌아가서 복음을 다시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조셉은 절뚝거리며 오두막집들이 빙둘러있는 마을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을 남자들이 그를 붙잡은 상태에서 여자들이 거침없이 가시채찍으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다시 벌어졌습니다. 이번에도 마을사람들은 의식을 잃은 조셉을 마을 밖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첫 번째 매질에서 살아남은 것도 놀라웠지만 두 번째 매질에서도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며칠 뒤 상처투성이인 조셉은 광야에서 정신을 차렸고 이번에도 역시 마을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 조셉이 돌아오자 마을사람들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세 번째로 채찍질을 가한 것입니다. 이번만큼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조셉은 다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를 때리던 여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번에는 자신의 침대였습니다. 웬일인지 그를 사정없이 매질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조셉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며 극진히 간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마을 전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가 목숨 걸고서 피 터지도록 행하고 있는 일은 어떤 것들입니까? 영원에 이를 것입니까? 순간으로 마칠 것입니까? 영의 일입니까? 육체의 일입니까?
*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이 어렵게 자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리브가와 결혼 한지 20년이 다 되도록 자녀를 낳지 못하자 여호와께 힘써 기도함으로 자녀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의 본문 21절에서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함으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음으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그렇습니다. 생명은 남녀가 하룻밤을 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잉태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능자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허락하신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결코 자녀를 잉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존귀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작은 소자, 그 누구라도 업신여기지 말고 사랑하고 축복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빚어내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에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창22:17) 하신 말씀을 따라 이삭에게 두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주시기로 약속된 것이었지만 간절한 기도로서 받아낸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약속받은 것이라도 기도해야 얻습니다. 큰 아들은 붉고 털이 많아서 에서라 이름을 지었고 작은 아들은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하여 야곱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서는‘붉다’는 뜻의 ‘에돔’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야곱이라는 이름은‘발꿈치를 걸어서 넘어뜨리다. 속이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두 형제는 태속에서부터 서로 싸우던 것이(22절) 이름에까지 그대로 드러나게 된 셈입니다. 에서와 야곱, 야곱과 에서, 이 두 사람의 운명, 이 두 사람의 미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어떻게 전개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어떻게?
* 쌍둥이 형제는 장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기질과 성격, 그리고 그 기질과 성격에 따른 행하는 일도 달랐습니다. 에서는 사냥에 능하였음으로 들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조용하여(quiet man) 집에서 머물며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이 두 아들의 기질과 성격, 행하는 일에 따라 그의 부모도 편히 갈렸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더욱 사랑하였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28절)
* 그러던 어느 날, 야곱이 팥죽(Stew: goulash), 진한 국물을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팥죽의 달콤한 냄새가 집안 가득 풍겨나고 있었음은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때 마침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와 심하게 배고픈 상태였습니다. 안 그래도 팥죽의 냄새가 달콤한데 배가 가득 고픈 상태에서의 팥죽냄새는 더욱 그를 자극하였고 정신을 잃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속히 먹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제 먹을 것에만 초점이 놓여있던 에서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Quick, let me have some of that red stew! I'm famished!”
* 당연합니다. 허기진 상태에서의 음식에 대한 욕구는 누구라도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40일 동안 금식하며 주리신 예수님께 먹을 것을 가지고 시험을 걸어온 것 아니겠습니까? 전능하신분이셨지만 사람과 동일한 육체를 입고 계셨던 예수님의 약점을 사단이 이용하려했던 것입니다. 식욕은 인간이 가진 절대 약함 중에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약함에 노예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나는 약하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야!” 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그 약함의 노예와 종이 되어 그 약함을 넘어서지 못하게 됩니다. 약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무력한 존재가 되어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잃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약함을 극복할 때만 얻을 수 있게 됩니다.
*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이름에 걸 맞는 붉은 것을 먹겠다고 달려드는 에서에게 야곱은 그 자신의 이름 뜻처럼 맞섭니다. 배고픈 형에게 순수하게 팥죽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교묘한 조건과 흥정을 내 걸었습니다. 그가 내건 조건과 흥정의 대상은“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31)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음모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 음모도 모른 채“내가 배가고파서 죽게 될 지경인데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 하냐. 지금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야곱 네가 요리하고 있는 그 팥죽이야!” 라고 하면서 야곱의 요구대로 맹세로서 자신의 장자의 명분을 넘겨줍니다.“오늘로서 나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너 야곱에게 넘기노라.” 아! 이 비극을 어찌해야 할지? 아! 이 어리석음을 어찌해야 할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기는 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 여러분! 장자의 명분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 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출13:2) 하신 말씀처럼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장자는 전능자의 손에 붙들려 있는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장자에게는 권위가 주어졌고(창27) 우선 적인 지위가 있었으며(창 43:33) 두 배의 가산이 상속되었고(신21:17)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렘31:9, 20) 되었습니다. 그런데 팥죽 한 그릇을 먹겠다고 그 고귀한 복인 장자의 명분을 넘겨주다니 말입니다. 육체를 얻겠다고 영혼을 팔아버리고,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늘을 넘겨 버리고, 죽음을 얻겠다고 생명을 내동댕이치는 것 같은 이 일을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혹, 오늘 우리는 넘겨주지 말아야 할 것을 넘겨준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더러운 것과 맞바꿉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것을 순간적인 것과 바꿉니다. 또 어떤 사람은 높고 귀한 것을 낮고 천한 것으로 맞바꿉니다. 오늘 나는 누구입니까?
* 오늘 신약의 본문 로마서 8장 5-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우리사람은 흙의 본성처럼 많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지기 쉽고 상하기 쉽습니다. 연약한 것들이 많아서 쉽게 넘어지고, 쉽게 무너지고, 쉽게 변합니다.
*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육체가 가진 연약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되 (1:27),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하신 말씀처럼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하나님의 영이 흐르고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회사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일터에서든지 사업의 현장에서든지 그 무슨 일을 하던지 영의 힘과 능력으로 육체의 욕구를 따르고자 하는 연약함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령의 힘으로 육체로 범하는 죽음의 일들을 통치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온 몸에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으로 우리육체를 다스려야합니다. 하나님의 장자로 부름 받은 우리성도들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정복당하지 않고 세상을 하나님의 영으로 다스림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 예수주님으로 다스림의 영토를 확장시켜감에 있습니다.
* 지난 주 우리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 2기 내각에 대한 인사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장관이 되겠다는 사람들의 면면이 참으로 실망을 감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교육부 장관 후보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불법 편법의 주식거래 혐의뿐만 아니라 심각한 논문 표절, 제자 논문 가로채기의 혐의로 가득했습니다. 또한 교육비전과 정책에 대한 질문에는 엉뚱한 답변을 쏟아내면서 폭소와 한숨이 터져 나오기를 반복 했다고 합니다. 또한 미래 창조 과학부의 장관이 되겠다는 사람은 농지법 위반 의혹을 가지고 있었는데 경기도 여주의 농지를 평소에는 정원으로 쓰다가 후보자 지명에 임박해서 정원의 잔디밭 사이에 고추를 심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민낯으로 드러났습니다. 나랏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그에 알맞은 인격과 성품,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불법이요, 불의한 일들을 하면서 어찌 나랏일을 하겠다고 나서는지 말입니다. 불법과 불의로 육체의 삶,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어찌 정의와 진실, 성실과 청렴이 요구되는 나랏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 장자의 명분! 곧 영혼의 일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에게 돌아갈 상급은 부끄러움뿐입니다. 죽음뿐입니다. 그러기에 육체가 영혼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육체의 연약함이 연약함을 넘어 노예와 종을 삼으려는 것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로 우리 자신을 늘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1 절에서 말씀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이제 결론적으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에서의 실수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가 넘어지게 된 것입니까?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34절) 하신 말씀처럼 에서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고, 영의 일보다 육체의 일을 더 사랑한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장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영의 일을 가장 우선시 하고 있습니까? 혹, 팥죽으로 비유되는 육체를 살찌우는 것, 붉은 것으로 비유되는 잠시 후면 사라질 것, 세상의 것을 얻겠다고 하나님의 것을 넘겨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넘겨주고서 세상의 것을 다 얻은 들 그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로마서의 본문 6 절에서 다시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하나님의 장자인 우리가 성취해야할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