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왔습니다. 그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같은 회화벽화를 그리기는 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불립니다. 그의 대표작은 십자가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조각한 피에타상입니다. 혹시 보신 분들이 있으 실지 모르겠는데 그 정교함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역사에 남는 미켈란젤로가 될 수 있도록 함께했던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입니다. 미켈란젤로는 14살 때 조반니의 소문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찾아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살펴본 조반니는 그의 재능과 기술은 대단하다고 생각했으나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한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아주 멋진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매우 훌륭한 조각이라며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인 조반니는 ‘이 조각은 아름답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지오바니는 다시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교회로 갔습니다. 그곳에도 아무 멋진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감탄하는 미켈란젤로에게 조반니가 물었습니다. "너는 교회 안에 있는 이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술집에 있던 그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기를 원하느냐?" 스승의 물음에 어린 미켈란젤로는 큰 도전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은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습니까? 삶의 가치는 어떤 것을 얼마만큼 소유했느냐? 로 판단되는 것이 아닌 그 삶의 내용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는 삶인가? 아니면 육체의 소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되는 삶인가? 하는 것이 얻는 삶과 잃는 삶을 가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얻는 삶입니까? 잃는 삶입니까?
* 잃어버린 자란 하나님 밖에서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세관의 장을 넘어서서 설령 한 나라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대통령이나 수상일지라도 그 삶이 그리고 그 행위가 하나님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는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사는 삶이 그리고 그 행위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육체를 따라........ 탐욕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잃어버린 자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 밖에서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몇 십억의 재산을 가진 부자 정도가 아니라 설령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을지라도 그의 삶과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는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정금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힘이요, 생명의 능력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 사는 사람들의 씀씀이가 과연 어떻겠습니까? 자유 한 자 같으나 욕심의 노예가 되는 일에 사용하고, 부요한자 같으나 사치 향락에 침몰된 삶을 위해 그 물질을 사용합니다. 즉, 죽음의 일들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5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그렇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서의 하나님은 생명! 그 본질인 동시에 생명! 그것의 전부가 됩니다. 그런 피조물이 하나님 밖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전부를 잃어버린 죽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그 생명을 얼마나 담보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라도 되겠습니까? 또한 뿌리 뽑혀 드러누운 나무가 과연 무엇을 결실할 수 있겠습니까? 열매는 제쳐두고라도 잎사귀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밖에서 사는 우리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술집 앞에 세워진 조각품처럼 곧 죽음의 냄새만 드러낼 뿐입니다. 죽음은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은 사단입니다. 사단은 얻으려다가 높아지려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존재 그 이하입니다. 이사야서 14장 11절에서 말씀합니다.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아! 가련하다. 육체를 높이려는 자여!
* 오늘 본문 말씀은 교회 밖의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입니다. 익숙한 본문 말씀이라 쉽게 여기는 분들이 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 어떤 말씀보다도 깊은 의미로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히브리 말로 ‘재 카이오스’입니다. 그 뜻은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 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삭개오는 자신의 그 이름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삶이 그 이름을 뒷받침 해 주어야 했는데 그의 삶의 내용이 그 이름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본문에서 그를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리 장’이라는 말과 ‘부자’ 라는 말은 결코 자랑할 만하거나 명예로운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허가 받은 도둑, 로마의 앞잡이, 혹은 남의 등골을 휘게 하는 사람들’ 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불의와 불법을 일삼으며, 아첨과 부도덕의 일들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리 장, 부자는 부끄럽고 수치스런 이름이었습니다.
* 그러나 ‘세상의 복’ 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삭개오는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는 자리에 올라 있던 사람입니다. 일반 세리도 아니고 세관의 장(a chief tax collector)이라는 높은 자리가 그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쓰고 싶은 것 마음대로 쓰는 정도의 재산을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용해도 고갈되지 않는 재산을 소유한 부자가 삭개오가 지닌 명함이었습니다. 그는 부러울 것도 없고 모자랄 것도 없는 삶, 즉 높은 사람이요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마음에 웬일인지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과연 어떤 사람이 길래?’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도 듣는 귀가 있는 터라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일어나는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에 대해 종종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종교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에게서는 듣거나 볼 수 없는 진리의 말씀과 그 말씀에 일치하는 삶에 압도되어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내적으로부터 궁금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갈망이 되었습니다. 아! 갈망하는 영혼이여!
* 본문 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나도 이제껏 그 누구로부터도 들을 수 없었던 진리의 말씀을 예수로부터 듣고 싶다. 나도 말씀과 삶의 일치뿐만 아니라 사랑과 정의로 살며 기적과 신비의 일들을 베풀어 사람들을 살려내는 예수! 그분을 직접 보고 싶다.”는 의지적인 표현이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높은 사람, 얻은 사람으로 살던 삭개오의 마음에 어찌 이런 갈망이 들었을까요? 세리장이라는 그 높은 권력 그리고 부자라는 그 풍부한 재산으로는 왜 만족하지 못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삭개오는 세상의 그 어떤 것, 즉 권력, 돈, 명예, 먹고, 입고, 마심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영혼의 허기, 영혼의 목마름으로부터 자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과 저도 이미 알고 있는 터입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채울 수 없는 허기(虛飢)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편 42편 2절에서 말씀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그렇습니다. ‘영혼의 허기’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 그리고 먹고 입고 마심은 육체를 위함입니다. 그리고 육체는 그러한 것들을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다고 다고 하느니라: Give! Give! they cry”(잠30:15). 그러나 육체는 설령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했을지라도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육체는 육체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육체는 영혼의 일을 도모하기 위한 도구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삶에 만족과 기쁨, 평강과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그 몸이 육체만을 위할 뿐 영혼이 하나님으로 채우지 못한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혼을 그리스도로......... 오직 그리스도로 풍성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라는 의미입니다. 영혼을 하나님으로 오직 하나님으로 갈급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삶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으로 풍성해 질 때 삶의 자리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만족함의 기쁨, 샘솟는 소망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912년 4월 14일에는 세계 최대의 해난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호가 2.223명의 사람들을 태우고 항해 하던 중 빙산에 부딪치며 일어난 사고입니다. 영화로도 이미 보셨을 것입니다. 당시 그 배에는 구명대가 승객수의 반 밖에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는 무려 1,522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승객 가운데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전도사로, 부흥사로, 그리고 설교가로 사역하던 존 하퍼(John Harper) 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 시카고의 무디 교회로 설교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몇 분 동안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한 비장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얼음장 같은 바닷물위에 떠 있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같은 형편에 놓여있던 한 젊은이에게로 헤엄쳐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아니요!" 그때 파도가 두 사람을 떼어놓았습니다. 몇 분 후에 그들은 다시 조금 가까워졌습니다. 존 하퍼는 좀 더 큰 소리로 또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화해하였나요?" "아직 못 했습니다." 이 때 큰 파도가 밀려왔고 존 하퍼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외침,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하는 음성은 파도 소리에 실려 계속 그 젊은이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 그 젊은이는 뉴욕의 한 교회에서 신앙 체험담을 증언하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죤 하퍼씨의 마지막 구원자입니다."
여러분! 죽는 순간까지도 구원의 복음을 외치던 존 하퍼!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는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선제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기헌신, 하나님의 자기 비움, 하나님의 자기 죽음의 열매가 바로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구원의 은혜요 영생의 소망인 것입니다.
* 본문 9-1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는 이 땅의 삶, 즉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의 뜻인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 이라는 삶을 잃고 살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죄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를 넘어서서 그 세관의 장의 자리에 올라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 큰 도둑이요 더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의 실상은 얻은 사람 같았지만 잃은 사람이었고 높은 사람 같았지만 내려앉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의 구원,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누릴 만한 그 어떤 자격도 조건도 없었습니다. 그의 육체는 행복했지만 그의 영혼은 불쌍했습니다. 그의 몸은 세상의 것으로 윤기가 흘렀지만 그의 영혼은 허기가 가득하여 가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과연 누가 이 가련한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이 사람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모든 절망 중에 소망이십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모든 허기짐에 부요이시며 모든 죄인의 구원이 되십니다.
* 세상에서의 높아짐은 낮아짐이요 부끄러움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낮아짐은 높아짐이요 칭찬이요 생명입니다. 또한 세상에서의 얻음은 잃음이요 허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잃음은 얻음이요 충만 입니다. 이제 우리가 힘써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높아지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닌 깊어지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깊어지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로 깊어짐보다 높고 견고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얻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품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품기 위하여.......’ 구원의 은혜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품는 삶보다 더 크고 풍성한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도전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얻는 삶입니까? 잃는 삶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