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시대의 최고의 웅변가요 철학자로 불리던 씨세로(Marcus Tullius cicero)는 ‘역사는 시대의 증인이요, 진실의 등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 우리가 살아온 2013년의 삶의 역사가 우리 자신을 증언하고 우리 자신의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어떻게 살았느냐하는 것이 어떤 사람인가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으로 밟아온 2013년은 우리 자신을 향하여 과연 뭐라 증언할까요? 과연 2013년의 우리들의 시간의 역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밝혀 줄까요? “너 하나님의 사람 맞아! 참 잘 살아주어 고맙구나. 네가 나의 빛을 비추고 있구나.”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음성을 들어야 할 텐데요.
* 시간은 곧 삶이고 삶은 시간 안에서 움직입니다. 인생은 무한한 존재가 아닌 한계가 지어진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과 더불어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인생80이라는 이 시간이라는 틀을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이미 아시는 것처럼 헬라어에서는 이 시간에 대하여 두 가지의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 첫째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간 즉, 하루 24시간 1년 12달이라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이것은 시계로 표시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크로노스의 시간에 매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에 대한 창조성이나 개척 정신이나 도전 정신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주어진 현실에만 급급하여 살아가며 일희일비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노예적 시간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의 시간은 언제나 과거가 됩니다. 시간과 함께 그 삶이 묻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적인 일을 위해 삶을 살지 않고 육체를 즐겁게 하는 썩을 양식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 두 번째는 주관적으로 주어지는 시간, 즉 물리적 시간이 아닌 가치와 의미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카이로스(Kairos)라 합니다. 카이로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시간을 시간으로 살지 않고 가치와 의미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속에서는 생명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고 열매 맺고자 하는 열기가 늘 뿜어 나오게 됩니다. 손에 무엇을 쥐었느냐가 아닌 그 손으로 무엇을 추구하느냐 하는 것이 삶의 모토가 되고 행복의 근거가 됩니다.
현세적이거나 상업적이지 않아 손해 보는 것 같은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서의 삶은 과거가 아닌 미래가 됩니다. 시간은 과거가 되지만 가치와 의미는 미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이 많은 노인이 사과나무를 무엇 때문에 심겠습니까? 전도서 3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런 면에서 볼 때 2013년을 마무리 해가는 시점에 서 있는 우리들은 과연 어떤 시간을 살아온 것입니까? 과거로 영원히 묻혀버릴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장래에 다시 얻게 될 삶을 산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미 지나버린 것이라 여기는 것을 다시 찾아 우리들의 손에 쥐어 주십니다.
*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높이 계셨으나 가장 낮은 자리로 친히 내려 오셨습니다. 가장 존귀하셨으나 가장 비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셨습니다. 가장 정결하신 분이셨으나 가장 큰 죄인들이라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을 더욱 가까이 하셨습니다. 가장 부요하셨으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동시에 반석이십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골1:16)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들의 교회가 그리고 교회된 우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신 일들을 반드시 뒤따르며 실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높아졌을지라도 그 높아짐에 취해 살지 않고 낮은 자리를 돌아보며, 존귀함을 입었을지라도 그 존귀함에 매몰당하지 않고 아프고 상한 사람들을 살펴주어야 합니다. 부요한 힘으로 고개 들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눈물 흘리며 소외된 사회를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그런 일들을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아시는 것처럼 지금 한국에서는 철도 노조가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무려 21일째입니다. 그 피해액이 1조가 넘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국가와 국민모두에게 참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철도 노조가 이 파업을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정부가 철도를 민영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대화하기보다는 철도 노조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권력을 투입하였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철도 노조원들은 지난 12월 24일 즉, 성탄절 전날 밤에 불교의 대표적 사찰인 조계사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들이 조계사로 피신한 것이 무슨 문제인가 싶겠지만 저는 철도 노조원들이 조계사로 피신한 일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 “왜 철도 노조원들은 조계사로 피신을 해야만 했는가? 그것도 그리스도께서 오신 성탄절 전날 밤에! 서울에 교회가 얼마나 많은데 교회는 왜 그들의 왜 피난처 그들의 안전한 보호소가 될 수 없었는가?” 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교회가 눈물 흘리는 자, 약한 자, 가난한 자, 소외 받는 자, 병든 자의 편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행하였다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에 그 마음을 의지하고 어려움을 호소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눈물 날 때..........괴롭고 답답한 일이 있을 때 교회로 그 발걸음을 옮겨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교회로 그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며 그 어려움을 토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왜 교회를 뒤로하고 조계사로 달려간 것일까요? 교회가 교회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성도된 우리가 복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때문 아닐까요?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는 그동안 심은 것을 거두고 있습니다. 세상으로 부터의 무시와 외면! 을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오늘 이 시간의 삶이 과거로 묻혀질 썩어질 것을 거두는가? 아니면 미래에 다시 찾게 될 영생을 거두는 가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지금의 이 삶이!!!
* 시편 90편 5-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홍수에 쓸려감 당하는 것 같은 순간! 잠깐 자는 것 같은 허무함!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베임을 당하는 것 같은 운명! 이것은 우리들의 삶의 시간을 두고 한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시간은 정말 짧습니다. 2013년을 시작한지가 바로 엊그제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다 흘러 또 다른 시간인 2014년의 땅을 밟아야 할 시간이 우리 앞에 이르렀습니다. 과연 지나온 2013년 12달 365일 8760 시간은 우리들의 삶에 어떤 의미일까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서 세상을 따라 세상의 것을 추구한 삶이었다면 2013년 8760시간의 모든 삶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시간들은 죽음을 위한 것으로밖에 정의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의 것을 쫒아 온 삶이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인생 전체에 꼭 필요했던 절대적 시간이었습니다. 그 삶이 형통하고 복된 시간이었을지라도 혹은 막히고 답답하고 병들고 상하는 괴로움이 가득했던 시간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또한 그것이 커다란 집을 완성한 것 같은 큰일이었을지라도 혹은 벽돌 한 장 쌓는 것 같은 미미한 일이었을지라도 지난 2013년의 삶은 ‘인생승리’ 라는 인생 전체의 궁극의 그림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2013년이라는 한 부분의 그림을 통하여 인생 전체의 그림이 더욱 돋보이고, 더욱 빛나고, 더욱 아름답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의 것을 쫓아온 삶이었다면 말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패는 실패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승리를 위한 밑거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작은 것은 작은 것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큰 것을 이루기 위한 기초석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은 고난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금과 같은 삶을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십자가는 십자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영광이 됩니다.
야곱의 삶이, 다윗의 삶이, 요셉의 삶이, 욥의 삶이........그리고 그 밖의 무수한 믿음의 선진들의 삶과 그들의 결과가 이를 증명합니다. 의의면류관(딤후4:8), 생명의 면류관(약1:12), 시들지 않은 영광의 면류관(벧5:4), 썩지 않을 면류관(고전9:25)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여러분! 올해 결과를 못 봤다고, 내 손에 만족할 만한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고 끝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전능자께서 거두게 하십니다.
* 지난 주 한국의 한 권사님이 보내준 You Tube영상에서 본 것입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복음의 씨를 뿌린다하는 저로서는 참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중국의 모우스 사막, 이곳은 황사의 진원지입니다. 풀한 포기 자라지 않는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막입니다. 그런데 이 사막 한가운데로 아버지가 정해준 혼처를 따라 시집을 간 여인이 있습니다. 생존의 방편조차 찾을 수 없는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로 시집을 간 여인은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맘이 무너지는 참담함을 경험했으나 그 여인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 사막에 자신들의 농장을 만들기로 말입니다.
* 이 여인의 하루 일과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당나귀를 끌고 19km떨어진 곳으로 묘목을 사러 갔다가 묘목의 단을 등에 지고 모래 언덕을 넘으며 하루 종일 나무를 심고 풀씨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나무를 심었는지 또 얼마나 부지런히 풀씨를 뿌리며 다녔는지 그리고 심어놓은 나무에 또 얼마나 많은 물을 길어다 날랐는지 첫째 아이는 조산되었습니다. 둘째 아이는 유산했습니다. 그리고 셋째아이는 바구니에 넣고 다녀야 했습니다. 생명을 거부하는 사막한가운데에 생명을 심기 위해 부지런히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 그렇게 20년이 지난 2001년, 그곳은 이미 온갖 채소와 곡식과 가축이 자라나는 옥토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숲을 이루며 가꾼 땅은 무려 여의도 면적의 9배가 되는 800만 평이나 되었습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던 곳일지라도 열심히 뿌리고 가꾸었더니 기쁨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우리성도들도 사막에 강을 내며 광야에 꽃을 피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2013년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생전체를 보며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명자입니다. 2013년 올 한해, 우리들의 살아온 삶을 보며 실망하고 낙심하며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인생80년,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삶의 전체의 그림을 보면서 여전히 소망으로 씨를 뿌리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전도서 3장 1-4절에서 말씀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