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새해, 새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받게 된 우리 모두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넘치는 은혜와 거부할 수 없는 소망이 임하기를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를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표어를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삶!” 으로 정하였습니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져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심령이 더욱 악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더욱 가까워 졌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선명한 빛이 되자고, 사랑을 잃고서 삭막해져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기쁨이 되자고, 그리고 주님 재림의 때를 더욱 견고히 준비하는 신앙이 되자고 이렇게 표어를 정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표어가 탐스럽고 풍성하게 결실하기를 소망하면서 올 한해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함께 힘써 수고하는 은혜가 우리가운데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맘을 다하여 함께 외쳐보겠습니다.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삶!
*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며 그 성도들을 악질적으로 핍박하던 유대주의자 사울이 주님의 절대적 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세상적으로 보면 탐낼만하고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며 복음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되었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된 바울이 건너지 못할 강은 없었습니다. 그 아무리 거세어도 건넜습니다. 넘지 못할 산도 없었습니다. 제 아무리 험해도 넘었습니다. 또한 그가 만나지 못할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목숨 걸고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분과 세상의 환경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의를 완성하시고 돌아가신 후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라하시면 그 어디든지 갔고, 행하라하시며 그 무엇이든지 행하였습니다. 인생의 참 목적과 그 결과가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를 만났습니까? 그분을 만난 증거가 삶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그의 믿음입니다.
* 사도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한 여종의 귀신을 쫒아준 사건으로 인하여 옷 벗김을 당하고 심히 매를 맞은 후, 발에 쇠고랑이 채워진 채로 깊은 감옥에 갇히는 참담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당하면 겁을 먹고 움츠러들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 사람의 본능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과 그 일행은 여전히 복음의 행진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참혹한 수모를 겪고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17:1)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여정은 약 160km 정도 되었습니다. 험난하기 그지없는 길이었지만 그들은 걷고 또 걸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서 말입니다. 매 맞은 상처로 무척이나 아팠을 텐데.........쉬고 싶었을 텐데........그만두고 싶었을 텐데..........
‘아!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자의 발이여! 그 신앙의 비밀을 알려주십시오. 나도 가리이다 나도 가리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52:7)
* 데살로니가 지역에 들어온 바울은 유대교 회당과 야손이라 불리는 사람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헬라인들과 많은 귀부인들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행17:4)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온갖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괴악한 사람들 즉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극렬히 핍박하며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그들을 피해 밤길에 피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겨우 3주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했는데(행17:2) 바로 그곳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울이 기뻐하고 감사하며 칭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로 굳건히 서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의 그리스 전역으로 표현되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전 지역으로 그들의 믿음이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로 소문이 난 것입니다.
본문 7-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게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 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 한번 생각해볼까요? 매일 이름난 주석 책으로 성경공부를 하며.......온갖 교제 동원하여 제자 훈련을 한 것이 아니고 또한 좋다하는 세미나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도 아닌 겨우 3주 있으며 복음을 전했는데.........데살로니가 교회는 어찌해서 이토록 놀라운 믿음의 본이 되는 교회로, 믿음의 본이 되는 삶으로 전 지역에 소문이 났을까요? 어떤 사람은 일평생 복음을 듣고서도 전혀 삶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당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 과연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의 삶이 어떠했기에 이런 놀라운 칭찬을 듣게 되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3절에서 그들의 신앙과 삶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 전 지역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앞서 복음을 받아 들였던 성도들을 넘어서는 믿는 자의 본이 되었던 신앙과 삶은 첫째는 믿음의 역사요 둘째는 사랑의 수고요 셋째는 소망의 인내였습니다. 우리 마음을 다하여 함께 외쳐보겠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2014년 올 한해 우리들의 교회와 우리들의 삶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꽃피우고 열매 맺음으로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불길이 꺼져가는 유럽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바로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사명입니다. 사명!!!
* 저는 이제 3주에 걸쳐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에 대한 말씀으로 증언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째로 믿음의 역사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믿음의 역사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무엇이 믿음의 역사이기에 그것이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 있을까요? 첫째로 저는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절의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고자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
* 여러분! 진실로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과 그 일행이었던 실라와 디모데가 전하는 복음을 들을 때에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은 감각기관인 귀나 세상 적인 지식과 지혜인 이성으로 받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영으로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 참으로 그렇습니다. 복음은 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지식과 지혜, 혹은 자기 경험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듣게 되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삶을 쪼개고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구원을 베풀고 생명을 주며 영생으로 이끄는 복음의 본질을 놓쳐버리고 판단만 하는 죄를 짓습니다. “에이! 그런 허구가 어디 있어. 하나님이 어찌 사람이 돼.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십자가에서 죽어. 설교자의 표정이 그게 뭐야? 설교의 문법도 엉망이잖아? 내가 해도 그 보다는 잘하겠다.” 말씀을 말씀으로 받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결과를 낳습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오직 열린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말씀으로 듣겠다는 준비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말씀이 말씀으로 들려지고 마음으로 받은 그 말씀이 삶에서 열매 맺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에서 말씀합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니”
* 만일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1-2) 하신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로 혹은 꿈처럼 여겼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결코 믿음의 조상 그 놀라운 축복은 그의 차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성패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을 낮추고 심령을 가난하게 하여 들어야 합니다. 한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는 대통령이 되었을지라도, 수만 명을 거느린 회사의 대표가 되었을지라도, 몇 개의 박사학위를 받았을지라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가난해야 합니다. 얼마나 권력이 크다고, 얼마나 부자라고, 얼마나 지식이 있다고 하나님 앞에서 높일 것입니까? (룩셈부르크에서의 한 교인의 말씀을 듣는 태도와 그의 삶)
*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마음을 낮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심령을 가난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말씀이 말씀으로 그 삶에서 결실하며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 올 한해, 데살로니가교인들처럼 이 강단에서 증언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받아 100배의 풍성한 결실을 이루어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둘째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지닌 믿음의 역사를 저는 오늘 본문 6절에서 그 근거를 찾고자 합니다. 무엇이 과연 그들의 또 다른 믿음의 역사였는가? 본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는 많은 환난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모양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으로 부름 받은 사도 바울의 삶은 참혹하리만큼 고난과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 대접을 받는 삶, 품위 넘치는 자리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못해서가 아니라 그런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에서처럼 누명을 쓰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일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삶이 그의 차지였습니다. (고후11:23-27) 굶고 춥고 헐벗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하며 복음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바울! 그는 말씀과 삶이 일치되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데살로니가에서 약 3주간 머물면서도 복음을 전한다고 결코 대접을 받으려거나 군림을 하려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 데살로니가 전서 2장 9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저는 이 말씀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잠시 펜을 놓고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을 다시금 새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섬기신 것처럼 나는 섬기는 자로 과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환난가운데서도 굴하지 않았던 사도 바울이 행한 그 놀라운 삶을 과연 끝 터럭이라도 잡고 있는가? 내 안에 높임 받고 대접 받으려는 욕망이 솟구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남위에 군림하려 들지는 않았는가?” 아! 환난가운데서도 일어서는 신앙이여! 아! 말씀과 삶의 일치여! 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여!
*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바울의 삶을 유심히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래,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저래야 하는 것이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저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구나.” 그래서 그들은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을 본받기 위해 무척이나 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닮고자 부지런히 애를 썼습니다. 그리하여 혹독한 고난까지도 이겨내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 당시 데살로니가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 주류사회로부터 모든 기득권을 빼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생활 전반에 있어서 수많은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소외되고 핍박받고 손해를 보는 삶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사도바울처럼 여전히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으로 경주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의 삶은 바울을 본받는 삶이었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습니다.” 가 아니라 우리의 앞선 신앙인들의 삶을 본받으며 예수그리스도를 날마다 닮아 가는 것에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로의 삶과 인격의 변화! 바로 그것이 믿음의 역사 입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과연 오늘 우리는 참 믿음의 역사인 그리스도를 진실로 닮아 가고 있습니까? 어떠한 고난과 손해, 어떠한 핍박을 받고 서라도 복음과 함께 삶을 다하시겠습니까? 그러한 신앙이 우리가운데 결실하여 이 시대와 역사 앞에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은혜가 우리들의 교회와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