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현 후 제 2주를 맞이하는 우리모두위에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의 은혜와 기쁨이 가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참 소망은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긍정적인 것에 눈을 뜨게 하며 마음을 두게 합니다. 또한 참 소망은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제아무리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의 파도가 밀어닥친다 하여도 그 고난과 어려움에 무릎 꿇지 않고 인내하며 전진해 가는 힘과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품은바 소망이 꺾이기 쉬우며 무너지기 쉬우며 좌절하고 절망하기 쉬운 흙으로 빚어진 우리 인생들에게 그러한 힘과 능력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에 심겨진 참소망은 무엇입니까?
오늘을 살고 견디며 내일을 바라는 힘과 능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우리는 과연 진정 그날 그 시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합니까? 오늘 본문 10절입니다. “또한 그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셨고, 그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노여운 심판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쉬운 성경)
* 예루살렘은 해발 780m 의 시온산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시온산 주변으로는 세 개의 골짜기가 놓여 있습니다. 동쪽으로 놓인 곳을 기드론 골짜기라 부르고, 남쪽에 놓인 곳은 힌놈골짜기라 부릅니다. 그리고 서북쪽으로 놓인 곳은 티로포에온(Tyropoeon) 골짜기라 합니다. 그런데 동쪽에 놓여있는 기드론 골짜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묘지가 널려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기드론 골짜기는 거대한 무덤계곡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이 무덤계곡이 되었을까? 지금도 왜 이스라엘사람들은 삼천만원 이상을 들여서 그곳에 매장지를 얻으려할까?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메시야가 오실 때에 예루살렘으로 오시고 그리고 기드론 골짜기에 묻히면 제일먼저 부활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곳에 묻히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하필 기드론 골짜기에 묻히길 원하는가? 그것은 요엘서 3장 12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국은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 장소로 여호사밧 골짜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학자들이 기드론 골짜기가 바로 여호사밧골짜기라고 주장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기드론 골짜기는 청동기시대 중간기부터 오늘날까지 부활을 기다리는 공동묘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삼천만원을 주어도 묘 자리 얻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 이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은 과연 어디로 임하는 것일까요? 과연 삼천만원을 들여서 기드론 골짜기에 묻히면 부활의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영원에 이르고 싶은 것은 인간들의 필연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빚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붙들리면 몸과 마음을 다해 묻힐 곳을 찾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어떤 핍박과 환난 앞에서도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처할지라도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안에 심겨진 소망은 어떤 것입니까? 기드론 골짜기에 묻히길 갈망하는 그릇된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 아닌 예수그리스도 시작하여 예수그리스도로 성취될 참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서 “믿는 자의 본” 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세 번째 능력이었던 소망의 인내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과연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겨우 3주 정도 복음을 전하였는데 복음을 받은 지 채 1년도 안되었던 교회와 성도들이 어떤 소망의 인내를 하였기에 마게도냐와 아가야뿐 아니라 전 지역에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가? 또한 그들이 품었던 소망이란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사도바울과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오래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 바울과 실루아노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지역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로 점점 충만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헝가리와 유럽이 다시 그랬으면.......) 그러자 유대인들이 “어! 저것들 봐라 이제는 데살로니가에서도 예수를 전하네. 이러다 큰일 나겠구나.” 하며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사도행전 17장 5절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들을 시기하여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군중 앞으로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쉬운 성경)
*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군중 앞으로 끌어내려고” 라는 말씀입니다. 헬라어로 ‘군중’ 혹은 ‘백성’ 을 ‘데모스’라 합니다. 이 단어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가 나왔습니다. 당시 이 말은 단순히 군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시민회의였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바울과 그 일행을 붙잡아서 시민회의에 세워 예수님을 처형한 것처럼 정치범으로 몰아 제거하려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음모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모두 가이사의 법을 어겨가며 예수라 하는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동을 합니다.”(행17:7)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하고 그들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와 황제를 반역하는 죄로 교묘히 덮어서 다 제거하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과 일행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보내어졌습니다. 그래서 겨우 3주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유대인 무리들이 그들을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너희들도 다친다. 바울과 그 일행이 당한 것을 보면 모르겠느냐? 예수를 믿고서는 이 땅에서 제대로 살 수 없다. 맘 편히 살고 싶어? 기득권을 누리고 싶어? 그렇다면 예수를 포기해라.” 핍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로 사는 길에서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핍박과 맞섰습니다. 어려움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생활의 손해를 감당할 뿐 아니라 오히려 감사 찬송을 했습니다.
* 핍박을 받으면 무서워 떨며 포기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좌절하고 낙심하며, 손해를 보면 불평과 원망을 쏟아 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들어. 예수 믿으면 복을 받아야지. 핍박받고 고난당하고 손해 보면서 왜 예수를 믿어? 이럴 것 같으면 난 안 믿고 말아!”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 4절에서 증언합니다.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불굴의 신앙입니까? 복음을 입은 사람들의 이 얼마나 놀라운 행진입니까?
* 환난과 핍박 앞에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예수행진을 하는 이 사람들!!! 그래서 사도바울이 놀라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겨우 3주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성도들.......그래서 “힘들지 않겠나? 어렵겠다. 제대로 설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그 걱정은 온데간데없고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도들로 견고하게 세워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핍박과 환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길에서 온전합니까? 우리들도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처럼 불굴의 신앙으로 시대와 환경과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예수행진을 이루어 가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모든 환난과 핍박 앞에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예수행진을 견고히 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향하여 “소망의 인내”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복음이 가져다준 소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영광의 그날, 곧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로의 입성을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17절에서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여러분! 진실로 그렇습니다. 장차 다가올 영광의 나라를 기다리는 삶, 그리스도의 재림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거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땅이 아닌 영원토록 존재하게 될 그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라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자의 밥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숯불에 굴려지는 것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품은 소망이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넘어서게 하는 힘과 능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품은 소망! 하늘을 품은 흙덩어리!
* 고린도 후서 4장 16-17절에서 말씀합니다. “현재의 힘겨운 시기는 장차 다가올 복된 시기, 우리를 위해 마련된 성대한 잔치(lavish celebration)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 있다가 내일이면 사라지고 말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메시지성경) 진실로 그렇습니다. 환란과 핍박과 손해를 당하면서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서 꿋꿋이 견뎌내고 이겨내는 믿음, 그것이 소망의 인내입니다. 그러기에 소망의 인내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을 경주하는 성도들의 표징이 됩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표징들은 무엇입니까? 소망의 인내! 과연 그 길에서 견고합니까?
*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나름의 소망이 있습니다. 기업가는 그 사업에 대한 소망 때문에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뜁니다. 농부는 추수에 대한 소망으로 한 여름의 거칠고 강한 뙤약볕에서의 수고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의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열심히 돕고 가르치며 후원합니다. 또한 청년들은 취업에 대한 소망으로 새벽 일찍부터 도서관에 줄을 서고 그 좁은 고시방의 고난을 참고 공부에 전념합니다. (공무원시험의 경쟁률 75:1)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전9:10) 만일 사람들에게 이런 소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수고를 그치고 폐인처럼 살 아 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망은 오늘을 견디는 인내의 삶을 살게 하는 힘과 능력이 됩니다.
* 그런데 세상의 모든 사람과 그들이 품고 있는 소망이 하나님 밖에서의 것이라면 그것이 제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다운 소망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그것을 불의의 소망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밖에서의 소망은 모두 이 땅에서 잘 살고 높아지려는 육체의 만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밖에서의 삶과 그가 거두었던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영원히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잠11:7)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불의의 소망이 아닌 산 소망, 복스러운 소망, 튼튼하고 견고한 소망이라 불리는 재림소망, 부활소망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베드로후서 3장 12-13절의 말씀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고 그 날이 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십시오. 그날이 오면 천체가 불타 없어지고 원소들이 녹아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알아채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의로 뒤 덮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그 어떤 환난과 어려움과 고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인내로써 삶을 경주하는 불굴의 신앙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재림신앙으로, 부활신앙으로 온 맘을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 신앙은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은 여러분을 이끌어가는 힘과 능력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 이제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표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