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화요일, 저는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맘을 금할 수없는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 중의 한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약 65세 정도 된 할머니가 성난 얼굴로 찬양하는 제게 오더니 “당신의 나라에 가서 노래해. 뭣 때문에 남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시끄럽게 노래하는 거야” 하며 소리를 지르고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닌 터라 그러려니 하며 찬양을 계속 불렀습니다. 그리고 찬양에 마음을 기울여 듣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찬양을 부르는 사이 조금 멀리 떨어져있던 그 할머니가 다시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또라이야. 정신 나갔지? 맞아! 정신이 나갔어!!!” 하며 진지한 얼굴표정과 함께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글 빙글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분도 불쾌해졌습니다. 저더러 또라이라며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리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분도 잠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할머니가 참으로 측은히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 “만일 저 할머니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성경을 읽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신10:19)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뿐만 아니라 만일 저 할머니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천국을 준비하는 분이었다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10:41)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나에게 냉수 한 병이라도 나누는 삶을 사는 복 받은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아! 안타까워라 참으로 안타까워라........65년의 삶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다는 말인가? 사랑하며 살아도 부족한데......... 섬기고 나누며 살아도 부족한데.........그에게 복음이 임해야 할 텐데.......그러면 사랑의 사람이 될 텐데.........”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진실로 복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복음의 진수는 원수 까지도 사랑하는 것인데 오늘 우리들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그는 지옥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그는 이미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넉넉한 주님의 사랑이 되어 오늘 이 자리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본문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깊은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도 삶으로 풀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유 없이 오른뺨을 치는데 어찌 왼편 뺨까지 돌려대며, 겉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 어찌 속옷까지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삶입니다. 또한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하는 사람에게 어찌 십리까지 동행하여 주며, 어떻게 원수도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를 해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는 이런 삶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죄 중에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결코 살아내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들이 있지 않습니까? “쟤는 주는 것도 없이 미워!!! 괜히 미워!” 육체를 입고 사는 우리사람들의 흔한 성정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어야 잘 해줄 수 있고 내 맘에 들어야 사랑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원수까지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복을 빌어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난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그렇게 살아라. 네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 세상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절대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본문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과 다름의 삶으로 제시하신 길은 “온전 하라. Be perfect”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무장할 때 ‘왼뺨까지도 돌려대며, 속옷까지도 내어주고, 십리까지도 동행하여주며, 원수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삶을 살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밝히 깨달아야 할 것은 “과연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입증되었으며 사랑은 모든 계명의 완성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법인 사랑을 성취하셔서 우리 사람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하신 이 말씀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운데 세우고 행하며,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삶의 잣대를 세우고 삶을 풀어 가면.......“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사랑해주셨는데.......” 하는 공식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매일 매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세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매순간 자신이 죽는 삶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매일 죽는 사람에게 어찌 원수가 있을까요? 매일 죽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분 냄이 나타날까요?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옛것이 죽고 새것으로 사는 영광!!! 주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늘 경험하듯이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전쟁하자고 달려들지 않습니까? 자기보다 높아지려하면 이유 없이 오른뺨을 치는 것처럼 모함을 하여 높아지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세상의 현주소입니다. “감히 어딜 올라가. 이젠 내가 올라갈 차례야! 내려와” 또한 세상은 자신이 손해 본다 싶으면 없는 일도 있는 것처럼 꾸며서 속옷과 같은 것을 가로 채려합니다. “난 손해보고는 못살아. 네 것 좀 이리 내놔 봐!” 뿐만 아니라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억지로 10Km를 걷게 하는 것처럼 애매한 일들을 덮어 씌워서 삶을 곤란하게 만듭니다. “이게 어찌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잖아!” 뻔뻔하게 달려듭니다.
* 이렇듯 싸우고자 덤벼드는 사람들을 향하여 만일 우리가 삶의 중심에 주님의 십자가를 세우지 않고서 세상과 동일한 식으로 맞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왜, 내 오른뺨을 쳐? 너도 맞아볼래!” 하며 같이 오른뺨을 치고, 속옷을 빼앗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을 제압하여 오히려 그의 속옷을 빼앗아 버리고, 억지로 십리를 가고자 달려드는 사람에게 “왜 내가 십리를 가야 하는데? 너나 가!” 하며 맞붙어 싸우는 혼돈이요, 어두움이요, 죽음의 전쟁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온전하심 즉, 사랑을 삶으로 입으라. 사랑을 양식으로 먹으라.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16:24)
* 이스라엘 역사뿐만 아니라 오늘까지 인류의 모든 역사 가운데에서 가장 탁월한 사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저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최고의 사람! 그 이상의 사람! 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왕의 아들이었기 때문도, 멋있게 잘 생겼기 때문도 아닙니다. 또한 블레셋의 삼만의 병거와 육천의 마병과 바다의 모래와 같은 어마어마한 군대를 향해 돌진하는 용기의 사람이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제가 요나단을 최고의 사람! 그 이상의 사람! 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품고 있던 다윗을 향한 사랑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마음에만 두지 않고 온전히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 사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보면 요나단에게 다윗은 삶에 걸림돌이요,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로 나아가는데 제거해야할 완전한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했을 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던지 아니면 잠자코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왕의 권세를 자신이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삼상20:31) 다윗은 제거의 대상이었지 사랑할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살아있으면 앞길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다윗을 자신처럼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 하니라.”(삼상18:1)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거침없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요나단의 사랑은 혈육을 뛰어넘는 사랑, 곧 원수까지 사랑하는 경지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구원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위대함, 한 사람의 멋짐 그리고 한 사람의 완전함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사랑의 실천, 바로 그것에 있습니다. 요나단이 비록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완전한 삶을 살았던 것은 그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경지까지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록 왕의 자리에 앉지 못하고, 왕의 옷을 입지 못하고, 왕의 권세를 누리지 못했지만 최고이상의 사람이 된 것은 그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진리와 사랑이 강수가 되어 흘러 넘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4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그렇습니다. 내가 죽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증거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진 삶에는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고자 하는 사람과 십리까지 동행하여주는 완전함이 열매 맺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에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지면 혼돈은 투명한 질서로, 어두움은 눈부신 광명으로, 죽음은 더 할 수없는 생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죽는 그곳에 참 생명과 영원한 승리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심장엔 무엇이 세워져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써 내려가는 삶의 일기장엔 무엇이 성취되고 있습니까?
* 여러분은 짐 엘리엇이라는 선교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개한 원시부족이었던 에쿠아도르 아우카부족을 선교하기 위하여 갔다가 그들에 의하여 29살 나이에 무참히 순교를 당한 선교사입니다. 그의 1948년 일기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 성공하게 하소서.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 아니라 제 삶이 하나님을 아는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마른 막대기 같은 제 삶에 불을 붙이사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멸하게 하소서. 저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주 예수님처럼 꽉 찬 삶을 원합니다.”
*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짐 엘리엇이 품었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곳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던 요나단이 품었던 마음을 품고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이익을 쫒던 삶은 의와 진리를 위한 삶으로 바뀔 것입니다. 죽고 죽이던 싸움터는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평화의터전으로 바뀔 것입니다. 또한 원수조차도 사랑하게 되는 생명의 터전으로 바뀔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이 삶으로 써내려가는 일기장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질까요? “심장에 십자가를 세우고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멸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영생을 얻었다.” 라고 기록되는 우리들의 삶의 일기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온전하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최고의 사람! 그 이상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