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도 익히 잘 아시는 것처럼 사람이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흙은 사람의 운명이 됩니다. 흙이 사람의 운명이라는 의미는 전능자의 시간이 이르면 그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잠간의 시간을 살면서 제아무리 높을지라도, 혹은 제아무리 많을지라도 교만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함께 그 존재도 그 소유물도 다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죄 중에 태어나서 죄로 인하여 죽음당할 존재인 사람에게 천국은 절대비전 (Idea)그 이상이 됩니다. 흙이 천국을 어찌 꿈이라도 꾸겠습니까? 결코 넘볼 수 없는 대상입니다. 죽음이 어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인 하나님의 처소를 마음에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흙인 인생에게서의 천국은 결코 꿈도 꿀 수없는 절대비전 그 이상인 것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 그러나 절대비전 그 이상의 하나님나라가 우리인생에게 값없이 은혜로 놓였습니다. 그 은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보혈의 공로로 열린 나라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삶을 고치면 흙이 영생의 존재를 입고 천국을 차지하게 됩니다. 또한 죽음이 생명을 입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천국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2-53)
* 그렇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흙에서 나서 썩을 일들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 어찌 썩지 아니 할 것으로 다시변화 되는 영생을 입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영광스러운 은혜를 어찌 말로 설명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 영광의 은혜는 누구의 차지가 되겠습니까? 형제자매여러분! 이제 우리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영광의 나라 천국인가? 아니면 영원한 죽음, 영원한 형벌의 나라 지옥인가? 우리는 과연 어느 길로 나아가야겠습니까?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절대비전의 나라 천국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하는 길은 모든 율법을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늘 삶을 새롭게 고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를 먼 훗날에 있을 이야기 혹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천국과 지옥이 가장 급박한 문제이고 그 어느 것보다 자신과 직결되어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다면 오늘이라는 생명이 붙어있는 그 삶을 결코 가볍게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자아성취 혹은 남부럽지 않은 미래를 위해 공부 하는 것보다도, 행복한 삶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것보다도 또한 자신의 진가를 펼쳐 보일 직장을 얻는 것보다도 혹은 좋은 집을 사고 자동차를 사는 것보다도 아니 이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급박한 일이고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천국과 지옥의 문제가, 영생과 영벌의 문제가 가장 급박하고 가장 절실한 문제일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문제는 늘 붙어 다니는 것이고 그 죽음은 언제 어느 곳에서 임할지 전연 알 수없는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9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명과 죽음은 늘 동일한 선에 놓여있는 것이고 죽음이 엄습하는 순간 우리는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의 그 엄연한 갈림길 앞에 놓이게 됩니다.
* 몇 해 전, 주님의 교회 청년들이 단기선교를 다녀갔습니다.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헝가리와 비엔나와 프라하에서 그 청년들을 데리시고 참으로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신비한 일들을 체험하는 것보다 즐겁고 복된 일은 없다는 것을 그때 그 청년들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받은 도전과 감동 그리고 훈련을 통해서 서울에서도 무역 센터, 대학가 등 여러 곳에서 역동적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팀원 중 한 청년이 두주 전에 안타깝게도 부고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건강하던 자신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운명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제까지도 아니 방금 전까지도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며 웃으시던 그 아버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결코 노크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장마비로, 어떤 사람은 자동차사고로, 어떤 사람은 수술도중에, 어떤 사람은 여행 중에, 어떤 사람은 물놀이 하던 중에, 어떤 사람은 밥 먹는 중에, 어떤 사람은 버스타고 가다가, 어떤 사람은 남이 던진 돌에 맞아........죽음은 그렇게 찾아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새 집을 장만한지 하루 만에, 어떤 사람은 시집가고 장가간 그날 밤에, 어떤 사람은 ‘이젠 좀 살만해졌어!’ 라고 고백한 때에, 어떤 사람은 새 옷 사다놓고 입어보지도 못한 채, 어떤 사람은 유산은 차치하고 빚만 잔뜩 남겨놓은 채 홀연히 떠나가 버립니다. “죽음아! 넌 어찌 그리 잔혹하니! 노크라도 좀 해주지. 예고라도 좀 해주지.”
* 형제자매여러분! 만일 우리의 삶이 죽음의 시간에 대해 준비되지 못했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9) 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반드시 영생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만일 우리가 준비되지 못한 채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슬픔과 고통을 뭐라 설명 할 수 있을까요?
* 인생길을 나그네 길로 비유하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땅이 목적지가 아니라 최종으로 나아가야할 목적지가 따로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땅의 삶을 나그네가 아닌 주인처럼 살아갑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다가 작별인사도 못한 채 떠나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그 절체절명의 시간을 세상의 그 어느 것 보다도 최고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 천국의 가치와 영광을 발견한 사람은 빌려 쓰던 밭에서 온갖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 마침내 보물이 가득 묻혀있는 그 밭을 산 사람처럼 자신의 삶을 다하여 천국의 가치와 영광을 차지하려 수고 할 것입니다. 만일 온갖 보물이 묻혀있는 밭을 발견하고서도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다면 그는 바보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천국의 비밀과 진가를 발견한 사람은 최고의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그 진주를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마침내 그 보배로운 진주를 손에 넣은 것처럼 자신의 삶으로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능력과 정성을 다하여 천국의 비밀과 그 진가를 누리려 수고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진실로 천국을 발견한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들의 삶은 그 천국을 차지하기에 합당합니까? 만일 우리가 천국을 발견한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삶은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삶과 분명한 차이로 드러날 것입니다. 삶이 세상과 차이가 난다는 것은 준비된 삶이고 준비된 삶은 곧 복음의 삶입니다.
* 유대사회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등 당시 종교주의 자들의 종교적 열성은 진실로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남을 의식하느라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회당에서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하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소리 높여 기도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주일에 한 번하기도 힘든 금식을 일평생 거의 빼놓지 않고 매주 두 번 이상씩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이러한 금식하는 신앙 생활하라면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며 거부할 것입니다. “이 바쁘고 힘든 시대에 금식까지 하라니!!!” 어쩌다가 금식하는 것은 할 수 있어도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일평생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인들은 그렇게 행했습니다.
*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온전한 십일조생활에 힘겨워하는 오늘날의 성도들과는 달리 철저한 십일조생활을 하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이러한 종교적 열성을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의 있음과 없음에 대한 실존을 분명하게 밝힘과 동시에 그 천국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 주시는 분명한 삶의 메시지입니다.
* 우리는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행하였던 기도생활, 금식생활, 십일조생활, 그 자체에 대해서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본문 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기도생활, 금식생활, 십일조 생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리고 더욱 온전히 해야 합니다. 그러한 생활은 더 깊은 영적인 세계로 인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마음의 표현이요 하나님께서 삶에 맡기신 사회적인 책임들을 감당하는 일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 할 수없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이 아닌 열정이 담긴 신앙생활, 어떻게 신앙하는지 흔적을 찾아볼 수없는 흐릿한 신앙생활이 아닌 선명한 흔적이 드러나는 신앙생활은 성도에게 절대적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 행위자체가 아니라 행위 속에 담긴 마음입니다. “아! 마음아! 너는 어디로 흐르고 있니?”
* 회당에서 거리에서 손을 높이 들며 간절히 기도하는 행위는 있는데 잔치의 상석에 앉고자 하며 높임 받으려는 마음, 누구에게서나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교만함이 문제입니다. 진리는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만큼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기도하는 만큼 섬김의 사람으로 더욱 세워져야합니다. 또한 일주일에 두 세 번씩 금식은 행하는데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습니다. 눈물 흘리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을 헤아리지 않는 사랑 없음이 문제입니다.
금식하면 마음이 가난해져서 이웃을 돌아보게 될 텐데 행위는 찬란하게 빛나는데 마음은 어두움입니다. 진리는 금식하는 만큼, 절제하는 만큼 사랑으로 충만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철저히 십일조생활은 하는데 연약한 삶을 살고 있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자하고, 작은 일들을 하면서 뇌물과 사례를 받고자 하는 욕심이 가득한 것이 문제입니다. 진리는 십일조생활을 하는 만큼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의 마음!!! 바로 이러한 것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천국을 차지하고자하는 자에게 가르치시는 율법을 품는 복음의 삶인 것입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천국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순전하고 거룩하고 보배롭습니까? 진정 우리는 그리스도로 심령이 가난하며, 의로움으로 애통하며, 그리스도로 온유하며, 의를 위하여 목마르고 배고프며, 내가 긍휼을 입은 것처럼 이웃에게 긍휼하며, 욕심이 제거된 청결한 마음으로 이웃을 보며, 십자가의 화평으로 하나 되게 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위하여 핍박받고 있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삶인데 말입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하여 날마다 삶을 정교하게 고치는 수선공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삶을 날마다 그리스도로 만들어가는 건축가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으로 대표되는 형식과 습관과 제도라는 옛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새것으로 고침 받은 삶만이 천국으로 입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 습관적인 교회생활, 제도에 매인 신앙생활에서 계속 떠나야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오직 복음으로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율법을 따르는 삶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열매 맺는 삶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