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버드대학 스미스소니언 우주물리센터에서는 2004년에 다이아몬드별을 발견했습니다. 그 별은 다이아몬드와 똑같은 탄소 결정체로 되어 있는 별이었습니다. 그것의 크기는 지구의 8분의 1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이 별의 이름을 루시라고 지었습니다. 또한 지난 2011년에는 영국맨체스터대학의 천문학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 천문연구진도 다이아몬드별을 발견했습니다. 그 행성역시도 다이아몬드 결정체로 되어 있는 백성왜성이었습니다. 이 별의 크기는 지구의 다섯 배입니다. 도대체 우주 공간에는 이러한 다이아몬드별이 몇 개나 더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누구의 차지가 될까? 생각이 듭니다. NASA의 연구에 의하면 우주에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행성이 은하수계에만 무려 백칠 십억 개 이상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이상의 우주 공간에 펼쳐져 있는 행성들의 신비에 대해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냥 무한대' 이것이 우주의 실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보이는 세계 속에서 살지만 보이는 세계보다 더 크고 영광되고 영원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보이는 삶은 영원히 계속될 하나님의 세계를 누리게 하고자 하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보이는 삶을 팔아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반드시 사야합니다. 그 세계를 얻지 못하면 보이는 삶인 인생이 마감된 뒤에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기드온은 전쟁승리에 대한 기념으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그 본래의 의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삼백 명의 용사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기드온의 이름이 차지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그릇되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함으로 결국은 바알을 숭배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기드온의 에봇은 기드온 자신과 그 가문에 올무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삿8:27) 패배는 패배로 머무르지 않고 그 패배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올무에 걸리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슬픔과 고난과 죽음이 그 차지가 됩니다.
* 기드온에겐 그 시대와 근동에 거주하는 왕들의 풍습처럼 많은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시대와 풍습을 쫒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기드온은 어찌된 일인지 이미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들로부터 얻은 아들이 무려 70명이나 되었습니다. 게다가 세겜 땅에는 첩을 두었는데 그로부터 낳은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아비멜렉입니다. 많은 아내를 두고 칠십 명의 자녀를 나으며 그리고 첩과 그에게서 나은 아들이 있다는 것은 그 시대와 주변의 상황의 눈으로 본다면 성공이요, 번영이요, 행복의 상징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들을 하나님의 안목에서 본다면 그것은 극심한 타락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일부일처제였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왜 그렇게 살았을까?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볼 것을 제대로 보았는가? 궁금합니다.
*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시대의 상황과 풍속이 그 어떻게 바뀐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서, 택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푯대를 보고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푯대는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좁은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절)
세상 모든 사람이 술에 취한다고 하나님의 사람이 술에 취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시대가 명품만을 고집하며 사치와 허영을 쫒는다고 예수의 사람이 그 시대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아부와 뇌물의 검은 거래를 일삼는 세상의 방식을 어찌 복음의 사람들이 답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면서 때로는 시대를 거부해야 합니다. '이건 아니야? 이럴 수 없지? 그 어떤 손해가 와도 나는 결코 타협할 수 없어' 또한 하나님의 사람은 때로는 시대를 이끌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는 길입니다.'
* 한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한국의 한동대학을 졸업한 한 학생이 그 어렵다는 하버드 대학의 케네디 스쿨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축하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동문들이 만찬을 열어 주었는데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벌어졌습니다. 선배들은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면서 '축하한다. 그러니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이 학생은 참으로 난감해졌습니다. 그곳에 모인 선배들이 하나같이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거절하면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사회생활을 할 때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마셔야 하나? 거절해야 하나? 그러나 그 학생은 하나님께 드린 자신의 삶을 세상의 기준과 논리에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깊이 기도를 하고 술잔을 들고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선배님들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서 술을 입에 대지 못합니다. 하지만 선배님들의 사랑을 담은 잔은 거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입이 아닌 가슴으로 이 술을 마시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술을 자신의 가슴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잠시 정막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두 사람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세상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각오하고 살면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혜를 주셔서 세상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지도 않게 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감동하게 만드는 빛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사람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멋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은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를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방식인 넓은 길로 가지 않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좁은 길을 찬송하며 나아갑니다. 넓은 길의 끝, 좁은 길의 끝을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보고 있습니까? 넓은 길의 끝, 좁은 길의 끝을 말입니다. 오늘 힘들어 보이는 것이 내일엔 탐스런 결실로 화답하며 오늘 고통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내일은 충만한 복으로 임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의 열매입니다.
* 기드온이 뽐내면서 걸어 나간 길의 끝은 패배였습니다. 그리고 그 패배의 열매는 너무도 쓰고 너무도 처절한 아픔이 되어서 그의 가문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드온이 죽자 기드온이 세겜의 첩에서 낳은 아들 아비멜렉이 탐욕에 사로 잡혀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탐욕이 얼마나 컸던지 눈이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의 말째 아들 요담을 제외한 70명의 형제들을 한 반석에서 다 죽이는 참혹한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드온도 행하지 않았던 세겜의 왕위에 올라 그 권세를 누립니다. 탐욕이 참으로 무섭지 않습니까? 어떻게 형제들을 그렇게 무참히 살해할 수 있을까요? 아비멜렉에게서 쏟아지는 이 탐욕, 그 살인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요? 탐욕은 사람으로 어둡게 합니다. 하나님 것도 탐내고 하나님 것도 도적질합니다. 탐욕은 사람으로 살인하게 합니다. 탐욕은 사람으로 짐승이 되게 합니다. 아비멜렉의 그 탐욕의 끝은 자신도 철저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삿9:53-54)
* 저는 이 지점에서 생각해 봅니다. 만일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서도 그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만일 기드온이 승전 기념을 위한 에봇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일 기드온에게 스데반집사처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열려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그 가정엔 천국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 가문에는 평화의 강이 끊임없이 흐르며 그 민족가운데는 기쁨과 번영의 복이 흘러 넘쳤음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보이는 것에 마음 두지 않는 삶! 하늘을 향해 열린 눈! 이것보다 보배로운 것이 있을까요?
시편 31편 19절에서 말씀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가문에는 말할 수 없는 은혜, 넘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 한 마약중독자의 고백: "나는 마약중독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이 내게 들어오시니 그 마약이 마약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젠 내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보이지 않고 오직 주님과 그 나라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하여 온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섬깁니다.
*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종종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그 십자가의 죽음은 상상이상의 고난이요, 아픔이요,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 속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었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분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탄원하셨던 것입니다. 육체를 입은 우리사람은 보이는 것에 약합니다. 또한 우리 몸은 고난과 고통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현실에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오르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는 군병들과 회칠한 무덤 같은 삶을 살던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의 희롱에도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다 들으시며 십자가의 죽음, 그 영광된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타협하면 이기고도 진 싸움이 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 나아가면 실패한 것 같으나 영원한 승리의 길이 열림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거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누가 우리의 약함을 감당해주며, 과연 누가 우리에게 죄용서 함의 은혜를 베풀어 영생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패배는 패배로써 끝나지 않고 패배의 열매가 뒤따릅니다. 패배의 열매는 고난이요, 아픔이요, 절망이요, 탄식이요, 영원한 죽음입니다. 기드온의 가문이 그것을 오늘도 이야기해줍니다. 또한 승리는 승리자체로 머물지 않고 승리에 대한 열매가 뒤따릅니다. 그것은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영광이요, 영원한 복 영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오늘도 말씀해주십니다. 우리의 육체는 보이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것을 잡으려고 거짓되게, 추하게, 인색하게 삽니다. 그러나 육체도 그 세상도 다 지나갑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오늘 우리들이 싸우고 있는 삶의 싸움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싸움입니까?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영광과 승리의 그 세계를 기업으로 얻기 위한 싸움이 되기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