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삶은 잠간 피었다가 시들고 마는 꽃과 같습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답고 향기로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시 피었다가 시들고 맙니다. 인생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인생을 향해 나그네길이라고 말합니다. 나그네는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뽐내고 자랑할 이유도 없습니다. 때가 차면 쥐고 있던 것이 그 무엇이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간 살아온 삶을 심판받아야 할 자리로 나아가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는 바로 그날엔 우리가 한국이든 유럽이든 아프리카지역이든 미주지역이든 어디에서 살았는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짜리의 집에서 어떤 가구를 사용하며 살았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자동차를 소유했고 얼마만큼의 재산이, 어떤 보물이 있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제품의 신발을 신었으며 학교에서의 성적은 어떠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업을 했고 어떤 직장에 다녔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 심판대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그리스도를 성취하며, 얼마나 그분을 열매 맺으며 살았는가하는 것이 심판의 유일한 척도입니다.
* 요한계시록 7장 13-17절입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에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밧모 섬에 유배되어있던 사도요한이 환상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의 보좌주위에서 찬양을 올리던 장로 중 한사람이 묻지도 않았는데 말해준 내용입니다. 세상이라는 환난을 통과하고서 하늘에 올라 흰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가지를 들고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서 찬양하는 무리들은 다름 아닌 어린양의 피 곧 그리스도로부터 옛 삶을 씻김 받고 새 언약의 피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삶을 산사람들이라고 증언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인생들의 가장 큰 사명, 가장 중요한 싸움은 부와 명예와 권세와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닌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를 성취한 삶 곧 가난한 심령, 거룩한 마음, 순결한 영혼, 겸손한 영성을 열매 맺은 삶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성취하고자 그토록 수고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열매 맺고자 미디안과 같은 세상에서 큰 용사처럼 그토록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까? 가난한 심령, 거룩한 마음, 순결한 영혼, 겸손한 영성을 얻기 위한 싸움이아니라면 세상 모든 것을 그 손에 쥐었다 하도라도 그 싸움은 패배입니다.
* 미디안의 연합군 십삼만 오천 명과 기드온과 삼백 명의 싸움은 모든 인류의 역사, 세계의 모든 전쟁가운데서 가장 전무후무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도무지 이길 수없는 싸움에서 이기었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전쟁에서 놀랍게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여호와는 전쟁에 능하시다는(시24:8) 말씀이 다시 한 번 증명이 되었습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모든 싸움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셔야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들어주셔야 인생을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싸움은 먼저 각자의 자신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싸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순종의 전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의 사람들이 미디안의 군대를 향하여 횃불과 항아리와 나팔을 가지고 나아간 것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와 절대순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하나님께 절대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겐 하늘이 열리고 그에 합당한 은혜를 받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비결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민32:12)
*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승리를 얻은 이스라엘과 기드온이 패배하고 실패하는 아픈 역사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패배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 속에서 기드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드온이 놀랍게 쓰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시니까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기드온이 목숨을 걸고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리는 용장이 되었습니다. 삼백 명의 사람으로 십삼만 오천 명을 물리치는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미디안과의 전쟁에 자신들을 참여시키지 않았다며 크게 불평하며 다투려는 에브라임지파를 말 한마디의 온유함으로 다스립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8:2) 또한 전쟁을 치르느라 피곤하고 지친 용사들에게 떡을 제공해달라는 요구를 거부한 숙곳과 브느엘 같은 반역의 도시들을 의로움으로 다스립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기드온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드온의 모습을 본 이스라엘은 그를 추앙하며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본문22절입니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기드온은 분명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평범 이상의 특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세우시고 이끄시며 승리하게 하신 분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은 그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영원히 붙들어야 할 것을 놓치고 흙으로 돌아갈 존재를 붙들었습니다. 이것이 패배입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과의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가장 큰 패배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큰 부를 거두었지만 만일 하나님을 놓쳤다면 그는 실패자입니다. 남다른 명예를 얻었으나 그 명예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졌다면 그는 다 잃은 사람입니다. 또 큰 권세와 권력을 얻었으나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면 그는 절대패배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이 세워지면 그것은 우상이요 하나님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 것이 있다면 그는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우상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자리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자동차가 될 수도 있고, 자녀가 우상이 경우도 많습니다. 내가 우상숭배자가 되지 않는 길,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날마다 모시며 사는 비결은 가난한 심령, 거룩한 마음, 순결한 영혼, 겸손한 영성을 위한 신앙의 싸움꾼으로 날마다 나서는 것입니다.
* 이제는 기드온의 패배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자신들의 왕이 되어달라는 백성의 요구에 반하여 기드온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본문23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참 다행스런 장면입니다. 하나님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자로 높여드렸으니까 말입니다. 기드온의 대답처럼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요 왕이요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하고 보아야 할 것은 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자신입니다. 한 사람을 들어 어떻게 사용하시고, 어떤 길로 인도하시며, 어떤 은혜와 복을 내리시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그렇게 쓰임 받도록 삶으로 준비해야합니다.
* 그런데 왕이 되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거절했던 기드온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함으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백성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던 기드온이 어찌된 일인지 백성들에게 전리품이었던 금귀고리를 요구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겉옷을 폈습니다. 그리고 대적들로부터 탈취한 금귀고리를 즐겁게 내어 놓았습니다. 왕 같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모은 금은 약 11kg이나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이었던 오브라에 두고 사적인 예배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백성들의 마음을 갈라놓았고 바로 그것이 기드온자신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습니다. 올무는 죽음이요 고난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 에봇은 대제사장의 예복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제작한 에봇은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헤아리는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라하신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만든 에봇은 순금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려함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사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미디안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실로에 있던 성막제사에만 집중하지 않고 기드온의 에봇 즉 전쟁승리의 기념비가 놓여진 오브라에서도 제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였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한 마음에서 두 마음으로 나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릇된 예배를 드림으로 결국은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숭배하는 길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만일 기드온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는 가르침이 영혼 깊이 새겨져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만일 기드온에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는 가르침이 뼛속마다 새겨져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는 분명히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눅17:9) 하며 더욱 겸손의 자리로 내려 앉아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나서서 승리기념비를 세우자 했어도 단호히 거절했을 것입니다. “모든 영광 오직 하나님께만 돌립니다. 종은 무익합니다.”
* 하나님께서 미디안과의 전쟁에 나서겠다고 몰려온 삼만 이천 명의 사람이 많다고 돌려보내고 또 돌려보내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7:2)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손이 미디안을 이겼다고 자긍할까봐.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오직 하나님만이 승리를 주시는 분이심을 알리려 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먼저 나서서 하나님의 보배로우신 뜻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승리기념비가 무슨 소용입니까? 결국은 사람을 높이는 일 아니겠습니까?
* 기독교관련 한 신문에 이런 내용이 실렸습니다. “헌금의 감소는 ‘교회 파산’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한 교회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교회 건축을 진행했지만, 대출 이자와 건축 대금 지급에 시달리다 결국 건물을 경매에 넘기고 말았다. 이 교회 건물의 감정가는 80억원. 하지만 담보로 잡힌 빚과 가압류 금액은 100억 원이 훌쩍 넘었다. 한 부동산 관계자는 “2천 년대 중반 부동산 경기가 절정에 이르면서 교회를 비롯한 많은 종교 시설들이 증축 또는 신축됐지만 이후 이어진 불황 탓에 원리금 상환에 허덕이던 종교 시설들이 다수 경매시장에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무슨 내용일까요? 교회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빚을 내어서 건축을 했는데 헌금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빚 상환을 못하여 매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무엇을 위한 교회건축이었나? 누구를 위한 건축이었나? 교회건물자체를 하나님이상으로 섬긴 것은 아닌가? 목사님의 공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그 열정으로 성도들 마음 마음에 진정한 성전,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견고히 건축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성도들에게 은혜와 복과 승리를 안겨주십니다. 성도들은 그때마다 진정한 싸움을 위한 전쟁터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가난한 심령, 거룩한 마음, 순결한 영혼, 겸손한 영성을 위한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은혜를 은혜 되게, 복을 복되게, 승리를 승리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복과 승리 그 자체에 도취된 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기드온처럼 부지불식간에 헛된 일을 추구하게 되고 그것이 올무가 되어 고난당하게 됩니다. 성공하고서도 실패자가 되고, 승리하고서도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열매 맺는 삶으로 헌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