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 속사람과 겉 사람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속한 믿음의 사람과 세상에 속하여 세상 것들을 신뢰하며 사는 사람도 결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생명과 죽음의 차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생명의 사람이요, 세상 사람은 죽음의 사람입니다.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과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은 하지만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께 관련된 것에( 능력, 힘, 권세, 복, 사람들) 마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의 차이도 극명합니다.
무늬가 비슷하다고 하여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동과서가 극과 극으로 맞서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이 결코 하나 될 수없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과 믿음의 흉내만 내는 사람의 삶의 결과, 삶의 열매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7:17)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교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의 실제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가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까? 아니면 부르심의 실제는 제쳐놓고 여전히 현실에 목말라 있습니까?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자신에게 속할 것인가?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속할 것인가?
*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창15:6, 롬4:3)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 특별히 하나님의 벗(대하20:7)이라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입은 아브라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정신적 지주, 그 이상이었습니다.
영국의 처칠,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인도의 간디가 자신들의 민족사에서 영웅시 되고 있지만 그들의 의미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의 존재가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요8:39) 그러나 아브라함이 설령 아무리 위대하다할지라도 그는 결코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업적이 설령 세계를 모두 정복한 영웅이었을지라도 그는 결코 의지의 대상도 아니고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그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정도를 넘어섰습니다.
본문 33절입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아브라함의 자손! 우리의 아버지 아브라함! 유대인의 신뢰는 무엇이었으며 누구였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신뢰는 무엇이며 누구입니까? 하나님보다 집안을 더 많이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지식을 더 내세우며, 주님을 의지함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지는 않습니까?
*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의식가운데 살았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7:6)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삶, 얼마나 귀하고 보배롭습니까? 생각만 해도 떨리는 감격이요, 주체하기 어려운 영광과 기쁨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기회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 축복을 확장하고 창성케 하는 길은 오직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된 백성에겐 선민 된 권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선민 됨의 은혜와 복과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 즉 조건이 있었습니다.
신명기 7장 9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백성에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계명을 지켜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 된 권리만 누리려 할 뿐, 진실 되게 하나님을 사랑하려거나 그 계명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틈만 나면 제멋대로 살려했고, 좀 숨 돌릴 여유가 생기면 세상의 방식을 쫒아 살기가 일수였습니다.("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창8:15).
* 하나님께서 선민, 택함, 구원이라는 사랑의 잔치를 벌려 놓으시고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셨는데 이스라엘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품으시려고 얼마나 마음을 태우셨는데 이스라엘은 듣지도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사랑입니까? 안으려하는데 도망가고 기다리는데 외면하고 사랑하자는데 멸시받는 하나님의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은 애굽뿐만 아니라 바벨론, 앗수르, 밧사, 수리아 그리고 로마의 노예로, 종으로 속박을 당하며 사는 아픈 역사가운데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면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며 복을 잃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펼쳐진 품으로 날마다 가깝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야 합니다. 안아주시려는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노예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 자유인이라 항변합니다. 그들이 자유인이라고 외치는 조건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아브라함! 괜찮을까요?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고 하나님이 벗으로 칭함을 얻은 아브라함의 자손된 것이 자랑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이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만이 각 개인과 세대에 자유를 수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택됨의 권리만 요구하는 것, 하나님의 법은 삶속에서 실행하지 않으면서 선민이라는 은혜만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선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부서진 약속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스로는 자유자라고 부르나 실상은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주님의 말씀보다는 물질이나 명예나 지식을 더 사랑하거나 자랑하는 노예로 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려고 삶을 가꾸어가는 자유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절) 진리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요14:6)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이시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요1:1) 따라서 누군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혀 삶을 건축해 가고 있다면 즉,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해가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제자 된 그에게는 하나님의 자유가 수여됩니다. 하나님의 자유자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에 결코 얽매이지 않고 그것들을 넘어섭니다. 무시하거나 깔보는 것이 아닌 통치하며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자유자는 육체의 것들을 탐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소망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문제를 제도나 환경, 혹은 의지에 의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나, 사람을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환경이나 혹은 '나는 자유인으로 살 거야!' 하는 의지적인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유의 문제는 영의 문제요 영의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해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영이 순종하는 삶으로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자유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이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그러나 그 아무리 민주주의가 잘 정착되어 있다는 미국에서 살지라도, 이 시대의 가장 최고의 복지국가라는 스웨덴에서 살지라도,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덴마크에서 살지라도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법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세상에 속박당한 죄인입니다. 죄인은 결코 자유자가 아닌 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나는 누구입니까? 진정 하나님의 자유자입니까? 진정한 하나님의 자유자는 주님의 말씀이 뚜렷이 열매 맺습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선민의식, 곧 종교의 형식주의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됩니다. 선민의식을 뛰어넘어 선민 된 삶의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선택받은 백성의 삶의 실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38-39절) 아브라함의 삶은 오직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육체의 아버지를 떠나 하나님을 따라나섰기에 그의 영은 늘 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예배자로 서게 되었고(창12:8), 천사들을 극진히 대접할 수 있었고(창18:1-8절)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려 마침내 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여겼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메시아를 기다렸을 것이고 메시아를 기다렸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신들의 주장과 같이 아브라함이 아닌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삶에서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말씀이 열매 맺어져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 도다”(요8:41)
* 자유에는 크기가 있습니다. 큰 집에 산다고 큰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많다고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재산이 가득하다고 자유가 가득한 것도 아니고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멋지고 아름다운 자유를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작은 집에 산다고 작은 자유를 누립니까? 지식이 없다고 재산이 없다고 자유가 없습니까? 가난하게 산다고 그가 지닌 자유가 가난합니까? 자유의 크기는 제도나 환경이나 의지의 다른 말인 선민의식이 아닌 그리스도를 깨닫는 깊이만큼,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의 넓이만큼, 그리고 그리스도로 채워가는 삶의 양만큼 확장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참 자유인으로 통하는 유일의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