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본문 4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마귀에게서 낳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유대인들은 육체적인 의미에서는 분명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복된 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은 영적, 도덕적인 면에서는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지극히 섬겼던 아브라함을 닮은 것이 아닌 마귀의 본성인 살인과 불의와 거짓과 욕심이 난무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그에 합당하게 살았어야했는데 그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시는 은혜’가 있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삶의 행위가 하나님을 닮은 것이 아닌 마귀의 행위를 닮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마귀의 자녀가 됩니다. 외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을지라도 그 삶에서 온갖 불의와 불법, 탐욕과 거짓, 무지와 교만 등이 터져 나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 됨을 상실한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외적인 닮음을 넘어 서서 내적인 닮음 즉, 삶의 행위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폭행범의 살인과 현장검증)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성도의 자리에 있는 우리들의 삶의 행위는 어떻습니까? 혹 유대인들처럼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랑은 하지만 진리에 눈과 귀가 가려있고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살인과 거짓과 불의를 행하고 있었던 것처럼 외면은 괜찮아 보이고 고급향수도 뿌려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내면은 다 썩어서 악취가 나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냄새를 행위를 통해 맡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냄새가 풍겨나고 있습니까? 생명의 냄새인가? 죽음의 냄새인가?
* 예레미야 24장에는 무화과 대한 이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상 중에 하나님의 전 앞에 놓인 두광주리의 무화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과 있었고 또 다른 광주리에는 도무지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 담겨져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 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일러 주십니다.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을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탐스런 극히 좋은 무화과로 비유될 수 있을까? 포로로 잡혀갔기에 오히려 안 좋은 무화과로, 포로 됨의 의미처럼 고난 받는 무화과로 비유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비록 포로생활의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겠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기에 극히 좋은 무화과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무화과는 당시 남 유다의 왕이었던 시드기아(BC597-586)와 그의 고관대작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은 백성, 그리고 애굽 땅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왕과 고관대작들! 그들의 삶이 얼마나 화려하고 풍요롭습니까?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사람들, 애굽에서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얼마나 안정되고 자유롭습니까? 그런데 왜 그들이 도무지 먹을 수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로 비유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다른 아비의 행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그들과 함께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좋고 나쁨,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의 기준입니다. 삶의 현실이 가장 힘들다는 포로생활가운데 있을지라도, 비록 삶의 현실이 각가지 문제들로 어려울지라도 그들의 내면이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그들의 삶은 그 어떤 것보다도 탐스러운 삶이 됩니다. 눈물은 기쁨으로 바뀌고, 고난은 소망으로 견디게 하며, 약함은 강함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풍요롭고,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좋아보여도 그들의 삶이 육체 곧 세상으로 충만하면 그것은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 됩니다. 사단이 그들의 아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저의 삶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탐스럽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복된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오직 외면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내면에 까지 완전히 새겨져 흘러넘침으로 행위로서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됨을 증거 함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47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죽음은 사람이 결코 계획한 일이 아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 인생의 길입니다. 건강하여 오래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태어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죽음은 예측할 수 없는 우리들이 맞이해야 할 현실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죽음으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새 생명으로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영광, 즉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참 생명은 말씀으로 통하고 말씀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8:51)
*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은 절대 구별되거나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은 말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들은바 대로, 깨달은바 대로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생명입니다. 물 떠난 고기가 죽음인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말씀은 행위를 이끌고 행위는 말씀을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려진 마음에서는 그 말씀에 합당한 실제적인 행위가 나타납니다.
옥토에 뿌려진 씨가 그 씨가 가진 정체대로.........옥수수를 심었으면 옥수수를, 밀을 심었으면 밀을, 감자를 심었으면 감자로 그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들은 사람들은 사랑을 들었기에 미워할 사람도 사랑하게 되고, 겸손을 들었기에 그의 이마에선 언제나 겸손의 빛이 비춰지고, 소망을 들었기에 삶의 모든 자리에서 소망으로 일어섭니다. 그리고 진리를 들었기에 불의 앞에 타협하지 않고 진리로 삽니다. 미워하거나, 교만하거나, 절망하거나, 불의하다면 그는 제대로 듣지 않은 돌 짝 밭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4:12)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려진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빛과 향기와 능력이 나타나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영원히 사는 영생의 문을 열어놓으십니다.
“아! 영생의 문이여! 그 영광의 문이여!” 그러나 비가 내리지 않는 땅은 황폐하게 되고, 물을 머금지 못하는 땅에서는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생명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새김질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생명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지 생명의 일이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일들이 그 삶을 대신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국은 영원히 죽음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가되시고 첫 부활의 열매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죽더라도 다시 살게 됩니다. 또한 썩지 아니할 거듭난 씨로 거듭났기에 죽음이 그를 소멸치 못합니다. 죽음은 부활의 영광을 입는 문이 됩니다. 또한 죽음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출발이 됩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향한 하나님을 닮은 행위의 시작도 영생에 이르는 그 마지막도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이 세상에는 살다가 죽을 사람, 그리고 죽어도 죽지 않을 사람 두 부류가 있습니다. 죽음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유대인들이 외쳤던 것처럼 죽음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육체의 현실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압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생명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아닌 영생을 봅니다.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을 봅니다. 현실을 넘어서서 영광된 세계까지 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