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1671년, 현종 신해 년 삼남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 흉년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경주의 한 부잣집 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습니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굶어 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굶는 모든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 주도록 하여라.' 이러한 주인의 당부에 따라 큰 솥에서는 매일 죽이 끓여졌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이 부잣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부잣집은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의 역할을 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당시 흉년이 들면 한해에 수 천 명 혹은 수 만 명이 죽어 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이 집만 찾아가면 살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부잣집이 보릿고개시절인 삼사월에는 한 달에 약 만 명 정도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팔만명의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분량의 쌀인 800석의 큰 창고가 바닥날 정도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가문이 바로 경주 최 부잣집입니다.
이 가문은 일대 1568-1636년 까지 살았던 최진립 부터 영남대학 설립에 전 재산을 바친 1884년부터 1970년의 11대 최준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 동안 그 부를 유지하였습니다. 부자는 3대 가기가 어렵다는데 어떻게 300년을 이어올 수 있었는가? 이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세육연'과 '가훈육훈' 입니다.
* 처세육연(處世六然)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에는 맑게 지낸다. 유사감연(有事敢然) :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득의담연(得意淡然) : 뜻을 얻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 가훈육훈(家訓六訓)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말 것.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할 것. 넷째,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 것. 다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여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는 시집 온 지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을 것.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누군가 만일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면 ‘현실을 너무 모른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바보 아냐?’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러한 최 부자 집과 같은 삶이 아니 이보다 더 보배롭게 살아야 할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 인생이라는 경주는 빨리 달리기가 아닌 바르고 분명한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경주입니다. 세상의 달리기는 빨리 달린 사람에게만 상급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인생 달리기는 빠르게 달린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 열매 맺는 사람만이 그 열매에 합당한 상급을 받습니다. 빨리 달리려는 사람이란 세속의 사람을 말합니다. 전능자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상실한 채 세상과 육체가 밀고 당기는 유혹과 욕망을 따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오직 이익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 사도 바울은 자신이 누리고 있던 세상적인 모든 소유물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베냐민 지파라는 출중한 가문의 뒷 배경, 가말리엘의 제자라는 최고 지식의 힘, 로마 시민권이라는 당대의 부러워하던 권리, 바리새인이라는 보장된 미래와 같이 빛나는 소유물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던 힘은 다름 아닌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보화인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예수그리스도가 그의 심령에 채워지니 그동안 보물처럼 껴안고 살았던 세상의 가치들이 눈 녹듯이 녹아내린 것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빨리 달리기를 하던 땅의 사람에서 바르고 분명하게 달리는 삶인 하늘의 사람으로 삶의 괘도를 수정한 것입니다. (oktober 23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일)/ 무조건 빨리 달리면 헛수고요, 서둘러 달리면 붙들어야 할 것을 놓치고 결국 삶을 그르친다).
* 그렇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항상 더 큰 보배인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빨리 달리기, 즉 세속의 이익을 위한 삶을 중단합니다. 그리고 혹, 느리더라도, 덜 얻더라도, 혹 부족할지라도 바르고 분명한 삶의 경주를 합니다. 하늘나라의 기쁨은 하늘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겠다는 삶의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의지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행하는 삶, 즉 바르고 분명한 삶의 경주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 여러분은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양심도 내 동댕이치고 좋아라하는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믿음의 행함을 이루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혹 손해 보았을지라도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알 수 없는 기쁨,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운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손해 보고 상처 받았기에 상심되었어야 할 텐데 오히려 알 수 없는 기쁨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비밀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존귀하고 보배로운 예수그리스도로 채워진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사람의 심령에서는 손해 보았음에도 이익을 얻는 것 이상의 기쁨이 대신합니다.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었음에도 칭찬과 격려를 듣는 것 이상의 행복이 마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삶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역설의 은혜입니다.
*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던 나사로에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 그러자 수족을 비롯하여 온 몸이 베로 쌓여있고 수건으로 얼굴까지 다 동여매었던 나사로의 주검이 돌무덤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여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기절초풍할 지경이었습니다.
'와! 도대체 이런 일이 어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우리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거야?' 생전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 게다가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썩은 냄새가 나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던 일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신반의 하는 사람들, 적잖은 웅성거림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11:44). 꽁꽁 묶었던 수건과 베를 차례로 풀어내기 시작하자 나사로의 몸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모습일까? 썩은 냄새가 날 텐데........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보기 흉할 텐데 .........'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가려 있다가 다시 드러난 나사로의 몸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병들어 죽기 전의 나약한 모습이 아닌 더 강건한 새 생명으로의 부활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분명히 드러난 현실이었습니다. 돌무덤에 안장되어 있던 나사로의 몸이 다시금 생명이 된 일은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받아 들여야 할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기는 것에서 보란 듯이 성취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시는 권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부활의 광경을 목격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생명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생입니다. "저 분이 바로 그리스도 메시아이시다."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살기 위해 끊임없이 죽는 영생의 사람들로 자리바꿈이 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 메시아 됨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당시 목자로 불림 받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로 큰 파장이 일자 그들은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함께 모인 공회원들은 예수님이 경계의 대상에서 두려움의 대상을 지나 이젠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하심과 행하심이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그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결코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삶,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 것이 아닌 하나님을 이용한 세속의 삶, 즉 육체를 즐겁게, 육체를 영화롭게 하려는 빨리 달리기 경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일들을 경험하면 그 일을 통해 하늘을 깨닫고 받아들입니다. "저런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뭔가 하늘의 징조가 있는 거야. 저 사람의 삶에는 전능자의 권능이 있어" 깨닫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땅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일을 깨닫기는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땅의 가치가 하늘의 가치보다 더 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가치를 받아들이면 자신이 쌓아 놓았던 모든 땅의 것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면 자기들이 누리고 있던 종교의 자리가 주는 모든 권리, 모든 이익을 상실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저는 오늘의 말씀 속에서 깊은 통증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종들로 자처했던 대제사장을 비롯한 바리새인, 서기관 및 종교지도자들이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 다니는 모습을 보고서도 어찌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그리스도를 놓쳤는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서 어떻게 모실까? 그 분의 일을 어떻게 도울까를 논의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하는 하나님의 대적들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의 삶이 육체를 위한 경주가 아닌 바르고 진정한 삶을 위한 인생경주,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먹고 입고 마시고의 빨리 달리기를 하였더니 던져버렸어야 할 것은 붙들고 붙들어야 할 것은 놓쳐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빨리 달리기 경주가 아닌 바르고 분명하게 달리는 경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