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되어 가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 나사로를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죽은 자는 다시 살리시고 생명의 가치를 꽃피우며 산 사람은 영원히 살게 하시는 권능이시기 때문이십니다.(요11:25-26) 여기에 모인 우리들도 생명의 가치를 꽃피우며 사는 성도들이기에 훗날 영원히 사는 자의 반열 인 하나님 나라에 반드시 서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런 소망이 있습니까?)
나사로의 부활은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통하여 자신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았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그러나 이미 부활신앙으로 살았어야할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을 보고서도 오히려 주님을 죽이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이날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요11:53) 그러나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의 모의는 ‘예수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살려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모의가 아닌 ‘어떻게 죽일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논의였습니다. 그들의 모의는 사망의 잠을 자던 사람들의 사망의 위한 모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들을 영원히 죽였기 때문입니다.
* 어쨌든 당시의 분위기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요11:57) 예수님 앞에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라는 절대 공포와 절대 절망이 진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특별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죽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는 결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그는 어디론가 숨어 버릴 것이다.”(요11:56) 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러한 예상과는 달리 오늘 본문 1절에 기록한 것처럼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로 올라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보란 듯이 사람들과 잔치를 즐기십니다. 자신 앞에 죽음의 길이 놓여 있는 것을 분명히 아셨지만 결코 그 길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마26:2) 생명의 진정한 목적을 향하여 정면 돌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된 것은 이 땅에서 생활인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 있는 삶으로의 생활, 즉 사명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나아가는 삶, 사명으로 나아가는 생활이 생명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생명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부여된 생명의 이유를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피해야할 상황에서는 피하셨고(요11:54) 맞닥뜨려야 할 상황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있었음을 알고 계셨기에 어떻게 죽일 것인가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베다니로부터 한 주간동안 십자가의 그 참혹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 길로 나아가십니다. 사명은 모든 고난과 죽음의 위협과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뛰어 넘어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명의 발걸음과 헌신의 증거입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뒷걸음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삶의 걸음이 뒷걸음치거나 머물러 있거나 혹은 앞을 향해 나아가거나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신 사명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뒷걸음쳐도 그것이 사명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잠시 머물러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사명을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또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사명의 부르심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 자체가 삶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사명은 뒤로하고 주저앉아 있다면, 세상의 세력이 너무 강한 것 같아 뒤로 물러선 것이라면 혹은 세상의 것들을 더 차지하기 위해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수치요 부끄러움이요 후회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가치는 세상과 현실 앞에 그리고 육체의 탐욕 앞에 주저앉히기에는 너무나 존귀하고 보배롭기 때문입니다.
* 사명이 삶을 가치 있게, 힘 있게, 용기 있게 합니다. 사명이 삶을 빛나게 하며 소망으로 충만케 합니다. 사명 밖에서 사는 육체의 사람은 높은 나무 일지라도 낮은 나무가 됩니다. 푸른 나무일지라도 마른 나무가 됩니다. 그 속에서 생명이 생명으로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명 안에서 사는 사람은 오늘은 비록 낮은 나무일지라도 내일은 높은 나무로 현재는 마른 나무일지라도 내일은 푸르고 무성함으로 나아가는 영광입니다. 그 속에서 생명이 생명으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17:24절에서 말씀합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I the LORD have spoken, and I will do it.”
* 오늘 본문에는 전혀 상반된 두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 중 한 사람인 마리아는 사명 안에서 산 사람이라 부르고 또 한 사람인 가룟 유다는 사명 밖에서 산 사람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은 사명 안에서 산 사람, 마리아에 대해서만 말씀하고자 합니다. 마리아라는 한 여인의 삶의 마당에 예수그리스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마리아의 삶에는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의미와 생명의 가치와 생명의 영광을 예수님을 통하여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녀의 삶은 마른 나무에서 푸르고 무성한 나무로, 낮은 나무에서 높고 아름다운 나무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 생명이 생명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전부였기 받은 복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 삶의 전부를 드린 사람에게서의 생명은 사명으로 바뀝니다. 사명은 아낌없는 헌신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낌없는 헌신을 드리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스런 역사의 한 부분은 맡기십니다.
* 이 여인 마리아에게는 당시 일반 노동자의 1년 품값에 해당하는 금액인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되는 향유가 있었습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라는 표현의 의미처럼 이 향유는 마리아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그 향유를 예수님께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풍습처럼 예수님의 머리에 이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향유가 흘러 발까지 이르자 마리아는 정연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여러분! 마리아의 그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지십니까? 우리가 이 시간 잠시 마리아의 그 헌신의 모습을 우리의 영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붓고, 정연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는 마리아의 모습...........’우리 마음에 전율이 흐르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헌신 할 수 있었을까? 그 헌신의 힘은 무엇일까?
*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에게서는 사망에 눌려 있던 삶이 생명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땅의 것을 차지하고자 하는 꿈에서 영원한 것에 꿈과 비전을 두며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그리고 목숨까지도 내어 놓습니다. 우리의 앞선 신앙인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사명에 붙들려 헌신했던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땅의 모든 보화를 팔아 하늘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들을 뒤로 던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헌신하지 않았습니까. 창에 찔려 죽고, 돌에 맞아 죽고, 불태워 죽고, 사자의 밥이 되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붙들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예수그리스도가 삶에 가장 큰 보화,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 가장 큰 보화는 무엇입니까?
*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그리스도의 몸에 붓는 자신의 헌신이 정확히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향한 흠 없는 헌신을 이루고 싶은 소망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드린 마음처럼 가장 보배롭고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본문 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소망을 알리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섭리로 사용되었습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마음을 그대로 받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면 하나님의 순결한 일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이 보배로우면 하나님의 보배로운 일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큰 것을 드리면 하나님은 당신의 큰일을 위하여 사용하시며, 우리가 생명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일을 열매 맺는 일에 우리의 생명을 사용하십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 앞에 쓰임 받는 보배롭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도구가 되기를 참으로 소망합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정녕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은 사명을 향해 드려진 것이고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삶은 마리아의 헌신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아낌이 없을 것입니다. 아낌이 없을 것입니다. 사명 안에서 산 사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높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