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막강한 나라의 기초를 다졌던 초나라 ‘장’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왕으로 등극을 하였을 때 대신들은 ‘장왕이 막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와는 달리 왕의 태도는 독선적이었고 악한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어느 날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가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왕이 되었으니 무엇을 하든지 반대하지 말고 따라오시오. 앞으로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할 것이오.’ 사람들은 모두 엄청난 개혁의 바람이 불 것으로 생각하고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장’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지나도록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매일 술판을 벌이며 즐기는 일에만 빠져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는 ‘왕이 최고입니다. 왕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옳습니다.’ 하며 적당히 비위를 맞추고 아부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라꼴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없었던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할 것이오.’했던 왕의 말이 두려워 그 누구도 왕의 잘못을 지적하려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거’라는 신하가 용기를 내어 왕의 술판이 벌어진 자리에서 이런 문제를 집어 들었습니다. (삼년불비 우 불명: 三年不飛 又 不鳴) ‘왕이여! 큰 새가 있습니다. 이 새가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도대체 무슨 새이겠습니까?’ 장왕은 취중에 눈을 껌뻑거리면서 ‘그 새가 3년 동안 날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3년 만에 날면 어떤 새도 쫓아올 수 없도록 높이 날지 않겠나! 또한 그 새가 3년 만에 울 때는 천지가 진동하지 않겠는가!’
왕의 이 말에 ‘오거’는 ‘이제 뭔가 있겠지? 왕이 왕다움의 일을 하겠지!’ 하며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왕의 술판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소종’이라는 신하가 죽기를 각오하고 왕에게 직언을 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폐하를 등극시켰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나라는 돌보지 않고 매일 주색에 빠져 계시니 어쩌자고 이러십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돌보셔야 합니다.’
그의 말에 왕은 노발대발 화를 냈습니다. ‘너는 내 말을 잊었느냐?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하면 죽는다고 했지 않느냐? 네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그러나 소종은 직언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왕이 왕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에 왕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나라에 왕이 없다는 것은 나라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가 없고 왕이 없는데 어찌 신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소종은 죽음 목숨이라 생각하며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왕이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종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소종! 왜 이제야 오셨는가? 초나라를 위해서는 당신 같은 ‘충신’이 필요하오. 내 앞에서는 누구나 다 잘하고 죽는 시늉까지 내지만, 나는 누가 충신인지 알 수가 없소. 그래서 내가 꾀를 낸 것이오. 죽기를 각오하고 내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을 찾기로 한 것이오. 오거와 소종 당신들이 이 나라의 충신들이요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들이오.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제일가는 초나라를 만듭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한 나라의 임금도 충성스러운 신하를 이토록 목마르게 찾고 있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충성된 일꾼을 찾고 또 찾고 계십니다. ‘누가 나의 충성스런 일꾼이 될까? 누가 나의 뜻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일할 수 있을까?’ 둘러보시고 그에게 마음을 두십니다.
시편 101편 6절에서 말씀합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과연 누가 주님의 살피시는 눈에 들겠습니까? 과연 누가 주님의 마음에 합하겠습니까? 배움이 충만한 사람도 아니고, 재물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외모가 출중한 사람도 아닌 다름 아닌 충성의 사람입니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크고 작은 일에 헌신하는 사람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충성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불충하는 사람들입니까?
*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충성의 근거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뚜렷한 충성으로 살아야 할 명확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이전의 삶과는 전혀 비교 할 수없는 새 삶으로의 길과, 이전에 가졌던 운명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없는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이 여러분과 제 앞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일평생 목숨을 다하여 충성으로 살아야 근거요 이유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5,17)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산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여전히 육체를 위하여 산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지난 2012년 6월 23일 오전 8시 15분쯤 대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50대의 한 남성이 아파트 6층에서 추락하는 네 살짜리 어린이의 목숨을 구한 사연 때문입니다.
그 주인공은 이 준희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고등학생인 자신의 아들을 등교시키려 고 집을 나섰는데 갑자가 한 여성의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직감으로 누군가 최악의 상황에 몰려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위를 보니까 비명을 질렀던 30대 여인의 네 살짜리 아들이 6층의 베란다 난간을 붙잡은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심장이 떨리고 얼마나 다급하겠습니까? 그는 순식간에 30m 정도를 냅다 뛰어가 골키퍼처럼 양 팔을 벌리고 아이를 받을 채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간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아이를 가슴으로 받아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이 모든 일이 비명소리가 난지 불과 15∼20초 만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 아이를 이준희씨가 받아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6층이면 약 15m 높이가 되는데 무사하기를 바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6층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아이를 가슴으로 받아내는 일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0kg이상의 물건이 시속 70km로 달려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기적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배트맨이다. 인간슈퍼맨이다’ 하며 감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해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그토록 위대한 것입니다.
생명을 건짐 받은 아이가 자신을 살려준 이준희 씨랑 전화통화를 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사랑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보답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기 때문이니까요. 여러분! 충성의 다른 말은 사랑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자리에서 보면 사랑이 곧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충성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우리가 우리자신을 너무도 잘 아는 것처럼 우리의 처지는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는 존재였습니다. 우리의 처지는 가장 악독한 주인 아래서 사람대접도 못 받으며 일평생 험난한 일만 하다가 비참히 죽어가는 노예보다 더욱 비참한 지경에 놓여있었습니다. 우리의 처지는 죄라는 높이 솟은 난간에 매달려 사망의 땅으로 곤두 박 칠 수밖에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롬3:13-17)
* 그랬던 우리들의 처지가 180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고 내가 그의 공로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믿는다면 그의 삶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에 일평생 흔들림 없는 충성으로 헌신할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세움 받은 자리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치 달이 초승달과 반달을 지나 보름달의 빛으로 그 부여함을 받을 일을 묵묵히 이어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치 사과나무가 한 겨울의 혹한을 이기고 봄에는 새순을 피우고 여름엔 풍성히 자라나고 가을엔 아름답고 향긋하고 탐스런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라면, 죄의 난간에서 목숨을 건짐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당연히 하나님의 태양으로, 그리스도의 달빛으로, 성령의 사과나무로 충성스럽게 살아갈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가 그 한 영혼을 충성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과 의지와 계획으로 얼마나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작심삼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진실로 깨닫는다면 그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충성으로, 사랑으로 주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밝히 깨닫는다면 나의 삶은 충성으로 빛나리. 나의 영혼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리.” 여러분! 오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았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이 찾으시는 충성의 사람인가?
* 그리스도를 핍박하며 애매한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일은 하던 사울이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발견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혀 새로운 사람, 복음의 위대하고 충성스러운 일꾼 바울이 되었습니다. 고기를 낚던 어부였고 비겁함과 눈치만 살피던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으면서 까지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절대적 사랑이요 충성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스데반, 폴리갑, 이그나시우스, 그리고 사자의 밥이 되기를 주저치 않았던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들!!! 충성으로 십자가 은혜에 보답한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가 하늘에 오르면 그 빛난 충성의 사람들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가 하늘에 오르면 우리는 그들의 머리에 씌워진 빛난 면류관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상급은 목숨을 다하는 빛난 충성의 대가입니다.
시편기자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 할꼬”(시편116편12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크고 작은 주님의 일에 목숨을 다하는 헌신! 충성이요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