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1년 10월 8일에 화재가 발생하여 불과 삼일 만에 도시전체 3분의 1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던 시카코대화재사건, 그 화재로 인하여 드와이트 레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목사님의 교회도 완전히 전소되게 되었습니다. 그 참담한 현장에 있던 무디 목사님에게 한 기자가 비꼬듯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신다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은 교회당이 불타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실까요?"
아무리 믿음 충만한 무디 목사라도 이런 경우엔 아무 말도 못할 것이라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디 목사님은 여전히 믿음 충만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 저 예배당보다 더 큰 예배당을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바로 그 기도의 응답으로 지금 교회당이 불타고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기존 교회를 철거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 텐데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해결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질문을 던진 기자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예배당을 지을 돈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성경책을 펼치면서 "돈은 가지고 나오지 못했지만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 하나님의 금고인 성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배당과 성경학교를 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곧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기자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조소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무디 목사님의 말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멋있고 커다란 무디 성경학교와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믿음의 삶은 잿더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기적과 영광을 보는 통로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어떤 믿음입니까? 주님은 믿음 있는 자를 찾으십니다.
* 우리를 위하여 친히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소경에겐 빛이 되시고 귀머거리에겐 선명한 소리가 되십니다. 절름발이에겐 아무리 걸을지라도 피곤치 아니하며 달음박질할지라도 곤비치 아니한 튼튼한 다리가 되어 주십니다. 또한 각종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겐 치유와 회복이 되시며 죽은 자들에겐 생명이 되십니다. 이 진리를 믿고서 하나님께 나아갔던 사람들은 그 믿음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나아만, 12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 바울, 마르틴 루터, 존 웨슬리, 무디..........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삶을 통하여 신비한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영광의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폭포수와 같은 거침없이 쏟아지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31장 3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그렇습니다. '무궁한 사랑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것이 창세 이래로 오늘까지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속에 드리워져있는 약함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우리 가운데 무궁한 사랑으로 거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에 널 부러져 있는 그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시고자, 그 가시의 아픔 같은 문제를 기쁨으로 바꾸시고자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가운데 현존하여 계십니다.
'주님께서 동행하심!'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 이것을 믿으십니까? 믿고 나아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믿고 따르면 영광을 봅니다. 믿고 행하면 결실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4:20-21).
* 오늘 본문에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경이라 하면 사물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어야 아름답다 밉다, 밝다 어둡다, 많다 적다, 높다 낮다, 깊다 얕다, 물이다 불이다.......... 등 본 대로 표현하고 느끼고 행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마6:22-23)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소경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귀머거리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만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최고 유일의 소원은 '선명하게 볼 수만 있다면, 제 대로 들을 수만 있다면' 이 될 것입니다. 마치 헬렌 켈러처럼 말입니다. "내가 사흘 동안만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저 동쪽에 떠오르는 태양이 보고 싶구나! 서산에 지는 낙조가 보고 싶구나!"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감사의 조건을 잃고 살아갑니다. 오히려 보고 들으니까 비판하고 정죄하고 욕심내고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질문을 던져볼까요? 오늘 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를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아름답고 건강한 몸으로 죄와 허물을 쌓아가는 사람입니까?
* 우리들이 가진 대표적인 감각이 '생각하고 말하고 듣고 보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러한 기능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가지지 못하였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여길까요? "참 안됐다. 어쩌다가 저렇게 태어났을까? 불쌍해서 어쩌나? 참 복이 없는 사람이군." 하며 우리를 동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세상사람 그 누구도 그러한 처지에 있는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는 자기 자신도 스스로 책임지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먹고살기도 힘든데 뭘............."
그런데 오늘, 이 복이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 가엾은 사람으로 불리는 소경에게로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길 가실 때에 그 소경의 처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날까지 소경의 처지를 보았던 무수한 사람들처럼 '불쌍하다. 안됐다. 가엾다.' 라고 하시고 그냥 지나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 이로라." 세상 가운데서 연약함으로, 나약함으로, 절망으로, 어두운 삶을 사는 이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시는 말씀입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겠다. 너의 눈물을 내가 씻어주마' 하시는 빛으로의 초청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흑암의 처지에 있는 우리 인생들을 아낌없이 돌보시겠다는 주님의 자기사명의 확증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 이로라." 우리인생들의 연약함, 아픔, 고통, 고난을 돌보시겠다는 소망의 약속입니다.
* 그 말씀을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침으로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 이후에 터진 일에 대하여 본문 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일입니다. 주님의 세계가 이렇게 놀랍고 믿음의 세계가 이토록 위대합니다. 주님과 소경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은 너무도 단순한 대화였고 너무도 단순한 순종이었는데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다니 말입니다. 아! 복음은 단순하여라! 그러나 복음은 위대하고 신비하여라!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복음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단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순하면 위대하고 신비한 복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은 결코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에서는 이 소경이 체험하였던 영광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주님의 복음이 아닌 자기체험, 자기 경험, 자기 지식에 근거를 둔 자기복음을 붙들고 살기 때문 아닐까요?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자기 복음엔 결코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소경은 잃었던 눈을 되찾은 것이 아닌 없었던 눈이 생긴 것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감동이 얼마나 벅찼겠습니까? 설명 불가입니다. 도무지 가망이 없는 일이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 제가 두 주전에 집시 마을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다시 차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탁 트여진 평야 지역으로 갔습니다. 두 주전, 목요일의 날씨를 혹 기억하십니까? 그날, 하늘이 얼마나 파랗고 높았던지 말입니다. 그리고 헝가리의 전체 하늘이 갖가지 모양의 구름으로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하던지 말입니다. 잠깐 차 안에서 보는 것으로 도무지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를 한가한 곳에 세워두고 사진기를 들고 드넓게 펼쳐진 밀밭으로 달려갔습니다. 하늘과 구름과 밀이 어우러진 그 드넓은 평야에 서서 감탄했습니다. 그 알알이 익어가는 밀과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구름들과 끝없이 푸른 그 하늘을 보고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그리고 그냥 그 순간을 흘려버릴 수 없어서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선명하고 분명히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으니 감탄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전혀 볼 수 없었던 암흑의 눈을 가지고 있다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광명의 눈을 갖게 된 이 소경이 감탄하는 모습이 그려지십니까? 그 소경의 흥분에 가득 찬 음성이 들려지십니까? '아! 아! 이토록 눈부시고 이토록 아름다웠단 말인가?' 그 소경이었던 사람은 저의 감탄, 감동과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않는 감탄이요 감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눈으로 만물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눈으로 사물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보아야 할 것만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눈으로 복된 눈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명한 두 눈을 주신분의 뜻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소경의 눈에 바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금가루도 아니었고 다이아몬드 가루도 아닌 흙이었습니다. 흙은 온 세상에 널린 것이요 결코 귀하다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주님께서는 그 흙에 무엇을 첨가하여 진흙이 되게 하셨습니까? 일반 물이나 약물을 개어서 반죽을 한 것도 아니고 주님 자신의 침을 첨가한 것입니다.
'땅에 침을 뱉는다'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럽게 여깁니다. 또 '침으로 흙을 반죽하여 눈에 바른다' 하는 것은 어린아이들 소꿉장난에서도 있을 수 없는 불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그 평범한 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지고 결코 깨끗하다고 여겨질 수 없는 것이 평범한 것과 합해졌을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암흑의 삶이었던 소경에게 온 세상 만물을 속속히 볼 수 있는 광명의 빛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지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생명과 능력과 소망과 영광으로 쓰여 집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은 가장 존귀하고 가장 보배로우며 가장 놀라운 일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평범한 것이 가장 보배로운 것으로, 가장 낮은 것이 가장 높은 것으로 쓰임 받는 역사! 그것은 주님의 일하심의 신비입니다. 또한 주님의 손에 들림 받는 것들의 신비입니다. 흙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침에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힘과 능력, 권세와 권능의 원천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계시잖아요.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의 언덕에 혹,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 외에 원치 않던 가시덩굴, 엉겅퀴가 피어 있어 힘들고 어렵습니까? 삶의 목자요, 영혼의 힘과 능력이 되시는 주님을 바로 그 자리로 매일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약함은 우리의 가장 강할 때 보다 더욱 강하시고, 그리스도의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은 우리의 가장 보배로운 것보다도 더욱 보배롭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이 흙으로 빚어진 우리의 삶에 닿을 때 우리의 어두움은 즉시로 물어납니다. 주님의 몸이 우리의 영혼에 임할 때 우리는 광명의 능력으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깨지기 쉽고 상하기 쉬운 흙덩어리인 우리인생이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능력인 십자가의 주님과 일치한다면 어떨까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저는 그 빛난 영광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