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에 홍수심판을 하실 때,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창세기 6장 11-12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 이었더라”
당시의 사람들이 육체를 가지고 육체의 즐거움과 쾌락을 누리는 일에만 사용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살던 시대를 타락의 시대라, 암흑의 시대라, 방종의 시대라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타락했던 노아의 시대와 우리가 현재 숨 쉬고 살아가는 21세기를 비교해 보면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요?
결코 그 누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노아의 시대보다 의롭다거나 거룩하다거나 옳다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이 시대는 노아의 시대보다 오히려 타락한 증거들이 너무도 명백하게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의 역사에서도 그랬지만 그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신바 된 동성애입니다.
* 여러분은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반역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목사라는 사람들조차도 이 동성애를 묵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USA)하면 1884년 언더우드 선교사를 파송하며 한국에 복음을 전했던 교단중의 하나입니다. 그랬던 미국장로교가 2011년 5월 10일에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동성애자가 장로와 집사가 될 수 있고 심지어는 목사도 될 수 있도록 교단헌법을 수정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교회가 세상과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 세상과 시대에 교회가 순응 혹은 이끌려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육체의 타락을 옹호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극한 타락과 혼돈의시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인 것입니다. 타락은 심판을 부르고 혼돈은 질서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그 만큼 주님의 때가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 바다의 밀물은 시간이 차면 여지없이 해안을 향해 밀려옵니다. 화산도 평상시엔 평온해 보이지만 때가 차면 거침없이 터져 그 속에 품고 있던 것을 다 토해버립니다. 결코 그냥 수그러드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해가 지면 밤은 기필코 찾아옵니다. 막을 수도 없지만 설령 누군가 막는다고 해도 결코 그 밤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불가항력(不可抗力: Act of God)이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시간도 꽉 차면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십니다. 그 시간과 때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찾아옵니다. 그리고 마치 추수 때가 이르면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들여놓고 쭉정이는 모아다가 불에 사르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거두어 하나님의 곡간인 천국으로 들여보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벌이십니다.(계19:9)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모아다가 그들의 삶의 결실인 지옥으로 아낌없이 던져 버립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 우더라.”(계20:15) 그리고 그 지옥은 구더기도 타지 않는 불 못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 우리 인생은 제 뜻과 욕심대로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보내진 일꾼의 삶입니다. ‘인생은 일꾼의 삶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코 우리의 주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일꾼은 불러주신 주님의 뜻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른 아침, 포도원에 부름 받았든, 정오에 부름 받았든, 혹은 일을 마감하는 시간에 부름을 받았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부름 받은 것은 오직 주인의 조건 없는 은혜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중요한 것은 그 포도원에서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일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늦은 시간에 들어왔을지라도 일꾼으로 불러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충성을 했다면 그에겐 먼저 온 자와 같은 동일한 상급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일찍 포도원에 들임 받았다고 게을리 했다면 그는 오히려 책망을 듣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마20:16)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일꾼 됨의 정체성, 주인을 향한 충성의 정도가 어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주인입니까? 아니면 주님께 부름 받은 일꾼입니까? 선한 일꾼은 결코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혹,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지는 않습니까? 혹시???
* 작년 3월에 일본에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사망자의 수가 무려 3만 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후 CNN뉴스에서 이런 내용이 보도 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VIV0S’라는 회사가 있는데 그 회사는 지하 대피소를 제작하고 제공하는 회사입니다. 200명에서 1,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비밀 벙커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깊은 지하에 그 공간을 마련하였는데 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에는 최소 미화 25,000불을 가져야 예약이 가능합니다. 25,000불은 지하 벙커를 사는 값이 아니라 단지 예약하는 비용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분양받으려면 그 비용이 얼마나 되겠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지어지고 있는 것 중에 네브라스카 주에 짓고 있는 지하 대피소는 그 규모가 백화점 수준이라 합니다.
제가 VIV0S를 검색해서 봤더니 최신식의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지진, 해일, 핵전쟁, 생화학 전쟁 그리고 행성의 충돌이 있어도 안전하도록 지어졌다고 광고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 벙커를 짓고 있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계 곳곳에서 지진과 해일, 화산폭발과 폭염 폭우가 얼마나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까? 도무지 오늘 날의 이 지구환경의 내일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전한 대피 장소를 마련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안전할까요? 글쎄요.
*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이 땅, 이 하늘, 그 어느 곳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수백 미터 지하에 마련한 공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철통같이 지은 건물일지라도, 혹은 최첨단의 장비들이 설치된 우주선 일지라도 사람이 자신의 몸과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안전한 곳은 결코 없습니다. 심판은 전 우주적으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과 그 때를 빗겨갈 피조물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모스 9장 2-3절에서 말씀합니다.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요.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형제자매여러분!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 그 엄중한 때를 면할 사람, 피할 곳은 전혀 없습니다.
선한 사람과 악인이 갈리고, 진리와 거짓이 판명되며, 알곡과 쭉정이가 나누이며, 양과 염소가 구분됩니다. 진정 그 날, 주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온전히 믿고 섬기는 사람은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친히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위대한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하십니다. 마치 죽음의 재앙이 광풍처럼 휘몰아치던 애굽 땅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최고의 완벽한 구원의 처소는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있습니다. VIVOS 신청하시겠습니까? 주님과 더욱 일치하는 것만이 유일의 비결입니다.
* 오늘 본문 40절-4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음에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 두 남자가 밭에서 일하는 중에 한 사람은 들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남은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왜 한 남자는 구원을 받고 왜 다른 남자는 버림을 당할까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두 여자가 맷돌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며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한 여자는 들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여자는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왜 한 여자는 들림을 받고 왜 한 여자는 버림을 받았을까요? 참으로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삶의 신비가 있습니다.
* 이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선진국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약 이만가지의 직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67억의 인구가 나누어 가지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지런히 수고하며 살아가는 삶이 목적이 제 각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고 싶어서,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고 싶어서,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갖고 싶어서 그토록 부지런히 합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얻으려는 ‘궁극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는 목적이 자신의 육체의 욕구에 따른 것이라면 아무리 거부가 되었을지라도, 그 어떤 놀라운 명예와 칭송을 얻었을지라도, 최고의 권좌에 앉는 권세를 누릴지라도 그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육체는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육체에 의한 육체를 위하여 살다가 마침내 버림을 당합니다.
여러분! 물욕에 사로잡혔다가 풀처럼 시들어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명예욕에 붙들려 살다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결말을 못 보셨습니까? 권력에 목말라 신음하다가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의 소식을 못 들어보셨습니까? 문제는 삶의 목적, 땀 흘림의 목적입니다.
* 삶의 신비는 바로 이것입니다.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열심 내어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닌 ‘어떤 마음으로, 누구를 위하여 땀 흘려 수고하는가?’ 에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께 데려감을 입는 은혜를 얻습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이 땅과 자신의 육체를 위한 것이라면 그는 버림을 당하는 저주를 입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과연 그 긴박한 시간, 절대 절명의 결정적인 시간인 종말의 때에 데려감을 입는 삶입니까? 아니면 버림을 받을 삶입니까? 저는 이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민이 깊어지고 두렵습니다.
* 만일 저는 데려감을 당하는 은혜를 입는데 여러분은 버림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반대로 저는 버림을 당하는데 여러분은 데려감을 입는 은혜를 입는다면 어떨까요? 둘 다 슬프고 괴로운 일입니다. 우리의 가족들 중 누군가가 버림을 받는다면......... ‘아! 생각하기도 슬프고 상상하기조차 괴로운 일이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가장 기쁘고 가장 복된 것은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 주님의 손에 의해 들림 받는 은혜, 주의 빛난 손에 의해 데려감을 입는 은총을 얻는 것입니다. ‘아! 생각만 하여도 가슴 벅차고 감격할 일이어라. 구원의 은혜여! 우리에게 임하소서.’ 이 놀라운 은혜, 이 영광스런 은총이 우리가운데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삶은 그 무엇을 하든지 더욱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밭일을 할지라도, 맷돌을 갈지라도 할 수만 있다면 더 순종하고, 더 충성하고, 더 헌신하고, 더 기도하고, 더 말씀 앞으로 나아가고, 더 섬겨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깨어있는 자의 삶이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