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향해 사람들은 ‘고해와 같다.’ 라고 합니다.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고 살아가는 삶의 마당에 어려움이 끊이지 않음을 비유해서 표현한 말입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수긍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때론 건강이 위협하고 때론 물질의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 혹은 직장에 예기치 않았던 위기가 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녀들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근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들을 만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힘, 즉 세상 사람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누가 나를 도울 수 있을까? 과연 누가 나를 이 어려움에서 건져 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며 도움 찾기, 사람 찾기에 나섭니다.
‘이럴 때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내게 힘이 되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날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참 괴롭고 답답합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을 의지하려는 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실제적이 못됩니다. 사람에겐 사람이 소망 둘 만한 가치와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화: 세상의 방법들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교인들의 삶과 거두어 들이는 아픔의 열매
* 이사야 31장 1절에서 말씀합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있을진저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은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흙이기 때문입니다. 흙의 존재는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은 사람을 인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눈뜬 소경이요 소경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사람을 의지하는지? 왜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불상에 절을 하고 그것들을 숭배하는지? 그리고 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점을 보러 다니고 사주팔자를 보고 그 귀신들에게 도움을 청하는지? ‘어리석도다. 참으로 어리석도다. 영혼을 가진 이가 육체에게 무릎을 꿇다니!!!’ 이사야서 31장 3절에서 다시 말씀합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도움이시며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토기장이이시고 그래서 그 어느 누구보다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들이 널려져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며 근심으로 몰아가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세상으로 달려갈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 올라가야합니다. 도울 힘이 없는 육체에게 마음을 기울 일 것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려야 합니다. 마치 거친 풍랑 때문에 자신들이 타고 가던 배가 침몰할 위기에 놓였을 때 주님을 흔들어 깨워 살려달라고 외쳤던 제자들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소리쳐야 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주여! 구원 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밝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의지함의 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가 받는 상처는 더욱 크고 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지수가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복을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사람을 향한 기대 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실망지수는 그의 영혼을 더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소망의 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크고 분명하게 임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에서 말씀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을 향한 소망지수는 얼마나 됩니까? 그분을 기다리는 만큼 만나며 그 분을 의지하는 만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소망지수100%, 하나님신뢰지수100% 우리의 영혼의 한결같은 상태여야 합니다.
* 로마서 5장8절 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단순히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 말씀에서 좀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심령에 새길 수 있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는 이 말씀은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 어떤 원자폭탄보다도, 그 어떤 행성의 폭발보다도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요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사건보다 더 우주적이고 더 놀라운 사건이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해와 달을 창조하신 역사보다, 땅과 하늘을 구분하신 것보다, 바다에 수많은 어족을 창조하신 사건보다도 훨씬 앞서고 고귀한 사건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운명하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나를 위해 친히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이 말씀의 의미는 우주의 중심축이 바로 여러분자신에게 쏠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세상 끝 날까지 여러분을 돌보시며 책임지신 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롬8:32)
* 만일 여러분과 제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자신에게 임한 것으로 확신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고난과 고통가운데서도 견고히 일어서고 또 일어서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카타콤에서 생활하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그 신앙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자 굴에서도 찬송을 부르던 그 불굴의 성도들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돌에 맞아 죽고 창에 찔려 죽고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빛보다도 더 찬란한 그 영광스런 능력은 과연 무엇으로 얻어진 것일까요?
‘목사님! 그 시대와 오늘의 시대를 비교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문화이해도 모르십니까? 카타콤의 성도들과 사자 굴의 성도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전혀 다릅니다.’ 라고 말씀하거나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도 사람이었고 그들에게도 모든 인생이 가지는 인간적인 욕구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넉넉히 승리할 수 있었던 힘과 능력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임마누엘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신다는 약속,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아직 흐리지 않은 밝은 눈이 있습니까? 그 밝은 눈으로 세상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우리 앞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다가 모든 고난과 역경가운데서도 넉넉히 승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뚜렷이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습니까? 그 귀로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들려주는 믿음 없는 소리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증언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빛나고 선명한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이여! 그대는 결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리라. 아! 뚜렷하고 섬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의 귀를 가진 사람들이여! 소망한대로 거두리라.
그러나 아무리 선명한 눈을 가졌을지라도 주님을 볼 수 없다면 그는 소경이요. 아무리 밝은 귀를 가지고 있다 하여도 지금도 생명으로 도도하게 들려지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머거리입니다. 이사야 40장 20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 도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이제 누구의 이름을 부르시겠습니까? 이제 누구에게 마음을 의지하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주님은 달려가십니다. 주님께 마음을 모으고 열망하고 기다리는 자리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나타내 주십니다. 골짜기는 높여주시고, 고르지 않는 곳은 평탄하게 하여 주십니다. 험한 곳은 안전한 곳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사 40:4) 민둥산엔 강을 여셔서 풍성한 수목이 자라게 하시고 온갖 종류의 새들이 아름다운 노래로 대 합창을 이루게 하십니다.(사41:18) 주린 자에겐 식물을 주시며, 갇힌 자에겐 자유를 주시며, 눈먼 자에겐 광명을 주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제목, 마음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십시오.
*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저술가로 꼽는 맥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신다. 경주하는 당신을 하나님이 응원하고 계신다. 결승선 너머를 보라. 하나님이 당신의 발걸음 하나하나 박수를 보내고 계신다. 너무 지쳐서 더는 못 가겠는가? 그분이 데려가시리라. 너무 실망스러워 싸울 힘이 나질 않는가? 그 분이 일으켜 세우시리라. 하나님은 당신 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