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르는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간증)
* 오늘 본문1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사도 바울은 우리사람들의 처지를 ‘빚진 사람’이라 ‘채무자’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채무자인가? 내가 왜 빚진 자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딤전2:6)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자신이 진 빚을 갚지 전 까지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진 빚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더 크게 속박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하루를 살 동안 얼마나 무수한 죄를 짓고 사는지 모릅니다. 어른이나 아이가 따로 없습니다. 아이들도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남자나 여자의 구분도 없습니다. 은밀히 죄짓는 것을 즐깁니다. 유럽인이나 미국인이나 아시아인이나 동일하게 죄를 짓습니다. 인종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면이 문제입니다. 잘 사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이 육체로 만들어 가는 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 지난 주, 한 인터넷 뉴스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대부분 고등학교를 중퇴한 10대의 조폭들이 가출한 한 여중생을 볼모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남성들을 모텔로 유인하여 협박하며 폭력을 휘두르고 금품을 갈취했습니다. 아주 고약한 놈들입니다. 어린 여중생을 볼모로 잡아 노예처럼 이용해 먹는 그 녀석들의 영혼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영혼이 있기나 한 것이겠습니까? 양심에 화인을 맞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성도는 다음 세대를 살아갈 그 빚나간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보다 더 한심한 것은 채팅에서 만난 여중생을 상대로 성 매수에 나선 남자들의 면면입니다. 약 20여명의 남성들이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 등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식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박사학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육체의 욕구를 따라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들의 지식, 그들의 지위, 그들이 소유한 물질이 무슨 소용입니까? 부끄러움만 더 할 뿐입니다. 이제 그 남성들의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그들의 자녀들은 그 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볼 것입니까? 아! 육체에 머물러 있는 짐승들이여! 아! 사망의 잠을 자는 자들이여!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육체의 욕구는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 한다는 사실입니다. 선한 것으로부터 악한 것으로 도적질하고, 하늘에 속한 것에서 땅에 묻힐 것으로 강탈하며, 생명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파멸로 끌고 가는 것이 육체의 욕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 그 완전한 빚을 진 사람들아!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것 이아니라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살아가라’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에게 승리자입니까? 아니면 패배자입니까?
* 하나님의 영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라 말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아무리 바쁜 삶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삶의 최우선으로 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의 사람들을 날마다 예배의 자리, 예배의 사람으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몸의 고민을 하는 사람이 아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 무엇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영의 고민으로 시시때때로 묵상에 잠기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들은 삭풍이 부는 겨울철이든 연한 풀포기가 솟아오르는 봄철이든, 비가 내릴 때든 뭉게구름이 갖가지 모양으로 둥실 떠있을 때든, 물 한잔을 마실 때든 향긋한 커피를 마실 때든, 자동차를 운전하는 중 시원스럽게 길이 열릴 때든, 길이 막힐 때든, 어린 자녀를 돌볼 때든 장성해 가는 아들을 길러 갈 때든, 어여쁜 새 옷을 입을 때든 10년 이상 된 빛바랜 옷을 입을 때든 그 언제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바 아버지!” 삶의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가장 큰 보화였던 옥합을 주님께 눈물과 함께 부어드린 여인처럼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다 드리고서도 더 드릴 수 없음에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의 눈물로 보답하고도 남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성령의 사람 말입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나 만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왕 중의 왕, 최고중의 최고가 하나님이 아니고, 모든 일상 속에서 아바 아버지! 의 감격의 고백이 터져나지 않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더 이상 솟구쳐 오르지 않는 메마른 가슴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육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육체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 자신에게 예리하고도 분명한 심판의 저울을 기울여 봅시다. ‘나는 어디에 속해있나? 오늘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 아니면 육체의 사람인가?’ 성령의 사람! 부러워라! 육체의 사람! 부끄러워라!
* 성령의 사람은 기계 만들어 지듯이 하루아침에 그냥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성령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본문 13절에서 밝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아 몸의 소욕, 육체의 행실들을 죽이며 나아갈 때 그는 성령의 사람으로 견고하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말이 강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그 만큼 영의 싸움이 긴박하고 그 만큼 영의 싸움이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영, 그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곧 그 삶 전부가 실패요, 죽은 삶이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 여러분! 다시 한 번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여중생을 상대로 성매매를 했던 남자들은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또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양심에 찔림을 받았음에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산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만물을 바라보아야 할 눈으로 포르노사진을 보고 있는 사람은 산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이웃을 돕고 사랑해야 할 두 손으로 이웃을 담을 허는 사람은 어떨까요? 하나님을 노래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입으로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은 어떨까요? 주님주신 물질로 자신에게는 그렇게 인정이 많으면서도 하나님께 인색한 사람은 어떨까요? 그리고 오늘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와있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몸은 예배하는 자리에 와있는데 생각은 다른 곳에 가있다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제가 읽고 있는 성경에서는 그런 사람을 결코 살아있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고 죽은 사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성경은 그런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나중에 핑계하지 마십시오. ‘신목사가 죽은 사람, 산 사람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았다. 육체의 사람과 성령의 사람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 죽고도 사는 길이 있고 사는 것 같았는데 죽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육체를 죽이면 살고 세상의 영으로 몸을 위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고 싶다면, 생명이 되고 싶다면, 육체의 생각을 아낌없이 삭제해야 합니다. 몸의 욕망을 미련 없이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살고 그래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분의 자녀가 될 때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은 그의 차지가 되는 것입니다.
* 시편 128편 1-2절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는 추수할 수 없습니다. 육체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육체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의 최고의 기쁨은 오직 하나님자신입니다. 그래서 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며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들에게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손에 범사가 형통하게 되는 복입니다. 그 손으로 일구어 가는 것 마다 백배의 결실을 이루는 복입니다. 그 손으로 행하는 것 마다 터질 듯한 기쁨을 얻는 복입니다. 온 천지만물 소유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손의 범사가 형통하기를 바라십니까? 손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마다 기쁨의 추수를 하며 풍성한 행복을 거두시기를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가장 큰 행복으로 높이며 사는 영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령으로 육체의 행위를 소명시키십시오. 죽음으로 비워진 그 자리에 아버지 된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