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등 뒤에서 거대한 권능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
❋ 본문 1-2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는 다음 이야기의 성취입니다. 아브라함이 해가 한창 뜨거울 때인 정오 무렵 마므레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눈이 열렸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온갖 정성을 다해 빵을 굽고 송아지를 잡고 치즈와 갖가지 정성을 다한 음식을 차려 하나님의 일행을 대접합니다. 상수리나무 그늘에서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까? (얼마나 마음이 흡족했을까? 얼마나 맛있었을까?)- [창]18: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 예배가 섬김이다. 예배에 정성을 다하면 어떨까? 그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성도라면?- 한병석 최국화성도 섬김: 하나님께서 드시는 것과 같다.)
❋ 하나님께서 음식을 드시는 동안 아브라함은 종처럼 그 곁에 서 있습니다. 뭔가 더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즉시 대령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While they ate, he stood near them under a tree) - 극진한 대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장막 뒤에서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던 사라의 귀에 하나님의 이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아이쿠! 하나님!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가능성 제로입니다. 나는 생리가 끊어진 노인입니다. 내 주인도 늙었는데 무슨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웃고 또 웃었습니다.
❋ 그런데 드디어 뱃속에서 자라 오르던 아기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날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능성 제로입니다.’ 했던 하나님의 그 말씀이 현실이 되어 사라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진 것입니다. 피식 웃던 그 웃음이 기쁨과 행복의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이없어 웃던 그 웃음이 행복과 감사의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라의 웃음을 누가 바꾸었을까? 사라의 웃음이 기쁨과 감사와 행복으로 바뀐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한 구절 안에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놀라운 일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돌아보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증거물이 바로 품에 안겨있는 아들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므로”- 절대 에너지입니다. (❋ 오늘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든지, 무엇을 보여주셨든지, 어떤 감동을 주셨든지 그것은 반드시 실행되고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산이 통째로 들려 바다에 옮겨지는 일도, 앉은뱅이가 걷고 뛰는 일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도, 홍해가 순식간에 갈라져 물 벽이 되는 일도,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나는 일도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이 성취된 증거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오차가 없는 능력이며 그의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닌 살아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서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 우리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또한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감동을 받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뜨거움이, 전율이 밀려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겠다는 것이구나. 나의 일에 함께하여 주시겠다는 것이구나!) 또한 성령의 음성을 통하여 약속의 말씀을 듣습니다. - 그런데 아직 성취가 되지 않았다고 걱정하며 염려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시편 119편 49절에서 증언합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주신 그날 말씀을 기억해주십시오. 그날 그때 제게 주신 감동의 말씀은 이 거친 땅에서 소망이 되었습니다. 소망주신 그 말씀, 마음에 힘주신 그 감동을 온전하게 이루어 주십시오’ -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감동주신 대로 여러분의 품에 그대로 결실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본문 3-4절: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얻은 아들을 품에 안게 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 반응한 두 가지 일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첫째는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이삭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왜 이삭이라 이름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장 18-1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창]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 이 나이에 무슨 아들이 있겠습니까?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복 받기를 바랍니다.’ - ‘아니야! 아니야! 이스마엘은 내가 주기로 한 약속의 아들이 아니야! 그는 너희들이 나의 시간을 앞질러 낳은 육체의 아들이잖아. 약속의 아들은 반드시 사라를 통해 너에게 안겨진다. 그를 품에 안거든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어라‘ 하신 말씀입니다. -
❋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아들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이 어려울 때는 겸손하다가도 뭔가 손에 쥐면 목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들을 종종 봅니다. 왜 겸손이 교만으로 바뀌었을까? 왜 순종이 불순종으로 바뀌었을까?- 왜 그렇습니까? 그 얻음이, 그 높아짐이 자기의 힘으로 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내가 한 것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지극한 은혜로 베풀어 주신 선물이야‘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언제나 겸손하고 순종합니다. 결코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이 아들 내 아들이야!’ 라고 여겼다면 이삭의 이름이 바뀌었겠지요. 이름이 바뀌었다면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없었을 것입니다. ❋ 은혜 받았음을 알진대 응답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얻은 아들을 품에 안게 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 반응한 두 번째 일은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의 말씀도 창세기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17: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내가 낳은 내 아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아들임을 믿었기에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 주어져있는 모든 것들......그것이 자녀이든, 직장이든, 학업이든, 사업이든, 물질이든 -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합당한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할례 받은 자녀답게, 할례 받은 사업답게, 할례 받은 직장답게, 할례 받은 물질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가르치고 행하고 도전하며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물질이 할례를 받았다면?) - 할례 받은 자, 마음이 거듭난 자, 예수 십자가에 옛사람을 못 박은 자, 그들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 본문 5-7절: 이 본문 말씀은 사라가 하나님께 찬양 드리며 그 이름을 높여 드리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이삭을 낳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받는 자리에서 사라가 ‘나의 이 기쁨과 감사와 행복의 웃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이름의 뜻은 ‘그가 웃는다.’ 입니다. 웃음이, 이삭을 품에 안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누리는 이 기쁨과 행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아브라함은 백세였고 사라는 구십 세였으니 말입니다. 백세와 구십 세는 인간의 장벽입니다.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사라만 장막 뒤에서 속으로 웃은 것이 아닙니다.
❋ 창세기 17장 17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창]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 그래서 사라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었던 그 기쁨의 아들 이삭을 품고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입니다. - 불가능의 장벽을 무너뜨리신 하나님!!!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늘 백세와 구십세라는 불가능의 장벽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나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서 나고 그의 손으로 돌아갑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은 비록 불가능의 현실 앞에 있을지라도 모든 일들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며 미리 찬양 드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