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굳게 닫혔던 돌무덤은 누가 옮겨놓았을까? 아니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있었는데 그 돌무덤의 문을 누가 열어 제쳤을까? 죽은 자는 무덤 안에 있어야 하고 산 자는 무덤밖에 있어야 하는데….. 죽은 자가 안치된 적막한 그 무덤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천지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아담이 창조된 때는 어떠했을까? 무덤 안에서 벌인 하나님의 새 창조역사!...
누군가 주님을 무덤에서 빼돌린 것 같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소식을 접한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는 그리스도를 눕혔던 그 무덤을 향해 치달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눈꼽만치나 믿고 달음박질 한 것일까?
2.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열려진 돌무덤. 한쪽으로 제쳐져 있는 시체를 휘감았던 고은 세마포. 그리고 따로 가지런하게 개어있는 주님의 머리를 감쌌던 수건…… 인간의 그 어떤 지혜와 지식으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20장 9절)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실제! 과연 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과연 누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리고 부활을 확증 받은 증인의 삶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부활을 확증 받은 증인의 삶!!!나는 그것을 열매 맺고 있나?
3. 십자가 죽음 이후 사흘째 된 그날 저녁,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의인을 악인으로 서슴없이 몰아 죽이는 권력 잡고 살아가는 종교주의 자들이 판치는 세상! 그들에게 죽임 당할까 두려워 문을 꼭꼭 닫아 걸은 제자들 안으로 그리스도는 어떻게 들어오셨을까? 벽 뚫는 기계를 동원하셨을까? 그랬다면 제자들은 기계소리에 더욱 놀랐을 텐데…..아니 벽 뚫는 기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방법으로 자신들 안으로 들어 오셨으니 혼절 할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평화는 나로 말미암는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힘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못 자국 난 양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를 확인한 제자들은 생명의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이 자리할 수 없게 된 기쁨이 밀려온 것입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버린 기쁨!!!
4.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한복음 20:20절) 조금 전까지 그렇게 벌벌 떨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화 되었을까? 부활을 확증 받은 자는 진실로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증 받은 자들은 사방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환경 속에서도 진실로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오늘 나는 두려워하는 자인가? 담대한 자인가? 오늘 나는 절망하는 자인가? 소망으로 가득한 자인가? 염려하며 근심하는 자인가 기쁨 충만한 자인가? ….….. 내가 만일 두려워하는 자. 절망하는 자, 근심과 염려가운데 있는 자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만났습니까?
5. 디두모….. 쌍둥이로 불리던 도마!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충정은 ‘목숨을 바쳐서’ 였습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한복음11:16절) 그리스도께 대한 남다른 충정을 가진 그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크기의 상실이 되었을까? ‘그때 주님과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깊은 상실 속에 있었을 도마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은 제대로 펴보지 못했던 충정에 대한 반전의 시작이었습니다.
본문 2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확증 받겠다는 것입니까?
6.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런 일이 어디 있어? 뻥 치지 말아! 하는 의심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확증하겠다는 의심입니다. 목적이 있는 의심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부활을 보지도 못했고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만져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 복되다 해서 믿는 것입니까? 맹목적 믿음이 아닌 목적이 있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것을 신앙에 대한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맹목적으로 믿으니까 세상보다 더 이기적입니다. 맹목적으로 믿으니까 여전히 탐욕 합니다. 맹목적이니까 세속적이요 현세 지향적입니다. 맹목적이니까 복음의 본질은 놓쳐버리고 외형 껍질만 자랑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7.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형이하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너무도 당연한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을까?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을까? 이에 대한 답을 해결 받았다면 어찌 교회가 세상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성도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어찌 세상 사람들과 차이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어찌 목사와 성도가 복음전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이웃의 신음소리에 외면하고 교만하고 거짓하고 사치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섬기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 27-28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미켈란젤로 카라바지오의 의심하는 성 도마)
8.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을 확인하겠다는 도마의 야심찬 도전은 주님을 보자마자 이미 확증되어버렸습니다. 피조물 인간이 감히 어찌 전능자를 의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감히 어찌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다는 말인가?
넌센스!!! 인간존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아니 그리스도께서 만나주시면 그것으로 완전한 터닝포인트!!!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오늘날의 교인들과는 다른 신앙고백! 그래서였을까? 도마는 시리아,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동방의 복음전도자가 됩니다. 이방 땅에서의 복음전도자!!!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참혹하고 거친 시간을 보냈을까? 그럼에도 도마는 포기하지 않고 참수당하는 순교의 피로 주님께 가졌던 충정을 열매 맺었습니다.
부활을 확증 받은 자……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만나고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난 자……
그의 삶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십자가의 주님을 열매 맺는 삶이 됩니다.
주님의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목적 있는 의심을 품기를 바랍니다. 왜? 왜? 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 부활을 확증 받은 자의 신앙으로 열매 맺는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