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장 복 있는 사람이란 쌓아놓을 곳이 없어 더 크게 창고를 짓는 사람 아니요 자신에게 조차 부족한 것이지만 그것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장 눈부신 사람이란 보톡스 맞고 주름 개선한 사람이 아니요 세상 사람들이 목숨 걸고 숭배하는 것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영성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의 한계는 코 끝에 있습니다. 숨 끊어지면 그 모든 것 고스란히 놓고 가야 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이사야2:22절)
그러니 무엇에 욕심을 내며 무엇을 위해 그리도 탐욕 하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우리 인간의 이 땅에서의 삶은 안개처럼 잠깐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영원한 영광을 위해 부여된 사명입니다. 발람이 이 진리를 머리로 깨달은 것에서 삶으로 열매 맺었더라면 그 이름 아름다웠을 텐데…… 오늘 우리의 이름으로 어떻게 기록되어 가고 있습니까?
2. 오늘 본문 14-15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우리는 이 본문가운데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 이라는 단어에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발람의 교훈은 무엇이고 니골라당의 교훈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의(청동으로 만들어진 황소를 불에 달구어 그 위에서 처형함) 뒤를 잇는 순교적 신앙의 믿음을 지녔던 버가모 교회가 왜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책망을 듣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조선의 교회…..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칭찬을 들으며 민족을 선도하던 곳이었는데 오늘날은 왜 손가락질 받는 곳이 되었을까?
3. 발람의 교훈에 대해서는 민수기 22-25장 사이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가나안을 향하여 진격하듯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위력 앞에 가득히 겁을 먹습니다.. “소가 밭의 풀을 뜯어 먹음 같이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다 삼킬 것이다.”(민22:4) 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부돌의 아들 발람을 재물로 꾀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미 가나안 땅을 선물 받도록 복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세상 그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이미 명하신 복을 걷어버릴 수 있을까? 세상 그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을 틀을 수 있을까? 절대불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가나안 땅은 결국 이스라엘백성의 차지가 됩니다.
4. 그럼에도 발람은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었고 재물의 영광에 눈먼 사람이었기에 결국 발락의 앞잡이가 됩니다. 그리고 교묘한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백성을 바알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에 끌어 들입니다. 꽤 많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여기에 넘어졌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고 우상에게 받쳤던 제사의 음식을 먹고 신전에서 일하던 모압의 여인들과 행음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염병을 받고 죽은 사람이 이만 사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관련된 민수기 25장 1-3절 과 31장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5. 탐욕에 눈먼 자가 저지른 죄악의 실상입니다. 그 덫에 걸려 넘어진 자들의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만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은 불의의 삯을 기뻐하거나 불로소득을 즐거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외에 더 탐내면 결국 발람처럼 사단의 종이 되고 맙니다.
또한 성도는 깨어있지 않으면…..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바 되지 않으면 사단의 그물에 걸려들고 맙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듯이 사단의 목적은 하나님의 택한 성도들을 넘어뜨려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계 하였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절)
6. ‘그리스도께 정신 차리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어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할 목사가 사람의 종이 됩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할 목사가 세상의 삯을 위해 살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사는 존재로 타락합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제사장이 할 일입니까?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세상의 우상과 혼합하게 하는 일을 벌이는 이 사람이 가야 할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과연 오늘날에는 발람과 같은 제사장이 없을까? 성도들을 이끌어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놓아야 할 목회자가 오히려 성도들을 세상으로 끌고 가지는 않는지? 설교에 십자가복음은 없고 성공신화로 가득하다면 어떨까? 설교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은 말하지 않고 주님이 열어놓으신 영광만을 전한다면 어떨까?
7. 그런데 어디 목회자만 그렇겠습니까? 성도들도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깨어 있지 않으면 발람에게 넘어진 이스라엘백성처럼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과 혼합하는 버림받는 자가 됩니다. 자녀들을 말씀으로 훈계하고 양육하지 않음으로 사단의 먹이 감이 되게 합니다. 말씀에 깨어있지 않으니 이단사상을 이야기해도 혼합주의가 들어와도 모릅니다. 또한 에서처럼 순간의 이익과 즐거움을 쫓다가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망령된 자가 됩니다.
온 세상이 경제 성장, 경제 성장을 외쳤습니다. 성도들도 세상과 더불어 경제성장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경제성장이 알파와 오메가가 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라’ 하면 저주하는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조금만 더 모으자, 모으자……
그 결과가 코로나입니다. 코로나가 하루아침에 성장주의를 다 멈추게 하였습니다. ‘일단은 살고 보자. 목숨을 건져야 해…….감염 안 되는 것이 최고야! 두문불출…’ 밖에 다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죽는 줄도 모르고 모으자, 모으자 하던 세상이 죽을까 봐…… 한 순간에 바뀌어 다 숨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성도입니까? 아니 어떤 성도가 되어야겠습니까?
8.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순교로 증명한 안디바는 이 진리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탐욕으로 모은 재산으로 부요하게 사는 것보다 가난하지만 진리로 사는 것이 참 복이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의를 따라 죽는 것이 복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부귀영화는 아무리 길어도 100년 이하!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광의 복은 영원무궁!’ 성도 여러분! 오롯이 십자가의 길로만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게다가 바벨탑처럼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복을 구하려다가 마음이 미혹되거나 혼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얻은 기름진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로 통과된 거룩한 만나를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교회요 어떠한 성도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교회 서머나 교회 그리고 버가모 교회를 통하여 오늘 나와 여러분에게 메시지 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의 이름은 어떻게 기록되어 가고 있습니까? 발람이 아니라 승리한 자에게 주실 흰 돌 위에 새겨질 안디바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