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음과 얻음 사이에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마태복음16장 25절
여러 명의 아내 두고 있었으면서도 몸의 사욕,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밧세바가 한 사람의 아내 된 여인임을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동침한 다윗! 그 동침함으로 인하여 아기가 잉태되자 아기의 정체를 바꿔치기하기 위해 교활한 수작에 수작을 부렸지만 그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자 끝내 한 여인의 자랑스러운 남편이요, 자신에겐 충성스런 부하였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저로 맞아죽게 하라”(삼하11:15) 그 아름답고 용감무쌍하며 충성스러웠던 다윗은 어디로 가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가정 파괴와 살인도 서슴지 않는 황무한 다윗만이 남아있다는 말입니까? 육체를 즐겁게 하려면 영혼을 팔아야하고, 세상을 얻으면 하늘을 잃는다는 것을 다윗은 정녕 몰랐다는 말입니까?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쉴 새 없이 솟구치는 우리들의 마음을 스스로에게 결코 맡겨두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그리스도로 제어하지 않으면 삶을 갉아먹고 영혼을 도적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마음을 제어한 사람의 삶은 안개 같은 세상을 얻으려 눈독 들이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복을 얻으려 마음을 쏟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오늘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혹, 얻은 것 같으나 잃는 삶을 위해 그토록 분주한 것은 아닙니까?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삼하11:27) 자신의 살인지시로 우리아가 죽자 다윗은 기다렸다는 듯이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처(妻)를 삼았습니다. 이젠 복잡 미묘했던 모든 상황이 다 종결되어 자신의 뜻이 성취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자신의 그 모든 언행심사를 일의 시작부터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오는 약 1년 정도의 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낱낱이, 뚫어지게, 그리고 오래도록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삼하 12:1). 하나님께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은밀할 것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바다 끝의 모래 알갱이 하나라도, 우주 공간에 떠도는 미세먼지 한 조각이라도, 땅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 한 마리의 움직임이라도 다 헤아려 알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간음한 자를, 살인범을 모르실리가 있겠습니까?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8:17)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12:7) 다윗을 향한 나단선지자의 고발은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영혼까지도 팔아먹은 사람! 즉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란 육체를 위하여 욕심 부리다가 영혼을 강탈당하는 사람이요, 얻은 것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자신의 처로 소유하기는 했으나 소유한 것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잃고 또 잃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삼하12:10) 과연 다윗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을지라도 제 목숨 즉, 그 영혼을 잃어 버렸다면 그 얻음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얻음의 진정한 가치는 ‘온 천하’라는 세상 것이 아닌 자신의 목숨, 즉 하나님과 하나 된 영혼 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잃음과 얻음 사이에서 유일의 기준입니다. 그리스도로 당신의 땀과 노력의 푯대를 삼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