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 작품은 짤쯔부르크 카피텔광장에 세워진 것으로 2007년 짤쯔부르크 예술프로젝트에서 젊은이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기 위하여 마련한 것입니다. 이것은 스테판 발켄홀의 작품으로 제목은 ‘스파이에라’ 입니다. 지구본 위에 서있는 사람은 모차르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이름은 "Balkenhol-Mozartkugel(발켄 홀-모짜르트공)" 이라는 구어체 용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9 미터 높이에서 검은 색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300 킬로그램의 청동색 남성으로 묘사된 모짜르트 ………
모짜르트가 바라본 자기자신의 존재와 세상은 어떠했을까? 그는 과연 성공했을까? 사람들은 왜 그를 모짜르트의 공이라 불리는 지구본 위에 세워놓았을까? 훗날 저나 여러분이나 지구라는 이 세상을 떠날 터인데 그 날에 보게 될 우리자신의 세상살이는 어떠할까?그리고 지구를 떠나 다다르게 될 나라는 어디일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까요? 아니면 버림받은 형벌의 나라가 될까요?)
2.본문 41-42절 말씀보시겠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이스라엘백성은 입술로는 메시아를 기다린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과 삶은 하나님을 섬김에서 세상의 영광을 따르는 것으로 타락하여 메시아로 이미 자신들 앞에 오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눈이 가려져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과 평화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할 뿐 만 아니라 그를 거부하였습니다. 오호 통제라 슬프고 슬프도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보았더라면 구원과 평화와 영광의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들에게서 성취되었을 텐데……….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거부함의 대가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이스라엘 공동체붕괴라는 극한 고난이었습니다. 맹인 된 백성들이여! 예수그리스도의 눈물이여! 평화를 놓쳐버린 사람들이여! 형벌을 받는 인생들이여!!!
이사야서48:18절 입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과 신앙을 향한 주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혹 나 때문에 눈물 흘리시지는 않는지. 오늘 성도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내가 주님을 눈물 나게 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주님의 눈물은 눈물로서 마무리되지 않고 심판으로 연결됩니다.
3.43-44절 보실까요.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이 예언의 말씀은 주후70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월의 포위를 마치고 6만여명의 병력으로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켰습니다. 4개월의 포위기간 동안 약60만명의 시체가 성밖으로 던져졌는데 대부분 굶주려 죽은 사람들이었다고 역사가 요세프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세프스는 당시 갈릴리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유대인 장군이었으며 티투스의 통역 역할을 하던 사람으로 이 전쟁의 모든 일을 기록하여 ’유대전쟁사’ 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압제에 저항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설득했으나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로마의 공격에 맞서다가 참혹한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멸망을 당하여 무려 1900년 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민족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그 참혹했던 유대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하나 그것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군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예루살렘성의 포위를 풀고 퇴각하는 사이 그리스도인들은 즉시로 요단강 건너 베뢰아땅으로 피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4.누가복음 21장 20-22절에서 기록한 대로 순종했기때문입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몇 시 몇 분 정도 되겠습니까? 안전과 평화와 번영을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일까요? 아니면 심판과 멸망의 풍전등화 앞에 놓인 시간일까요? 이 시대는 주님의 복음으로 거룩해져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세상적인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은 복음적인 삶을 살아갑니까? 아니면 예수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서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날이 이를지라. 신랑을 맞으러 나아갈 시간이 이를지라. 심판과 멸망의 날이 이를지라!!! 눈이 열리기를……눈이 열리지 않으면 예수님도 거부하고 오직 세상만 따르니까요. 눈이 밝아지기를……눈이 밝지 않으면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을 못하여 멸망을 당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시집가고 장가가고 웃고 떠드니까요. 눈이 새로워지기를……그리하여 오직 말씀을 따르는 자가 되어 남은 자가 되기를!!! 남겨진 자가 되기를!!! 저는 여러분의 눈이 밝고 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날에 합당한 삶으로 온전하게 준비되어 그 영광의 잔치에 들어감을 입기를 바랍니다.
5.이제 45-46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타락한 교회여! 타락한 성도들이여! 성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에서 잘살고 높아지고 힘 자랑 하려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을 따라 모여든 쓰레기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대 제사장 및 제사장 등 종교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사두개인들은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모든 상권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며 백성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었어야 할 사두개인들은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두로의 세겔로 환전해 주면서 폭리를 취하는 강도 같은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예배드리러 왔다가 강도당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백성들이 희생제물로 사용하려고 가져온 가축이 흠이 있다고 판정함으로써 백성들을 속여 자신들이 준비해온 가축을 비싸게 팔았습니다.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없이 주머니를 털어 희생제물을 구입해야 했습니다. 강도당한 마음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6.“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성전이 무엇 하는 곳입니까?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엇 하는 곳입니까? 만민이 기도하는 집!!!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낮거나 높거나 어린이나 어른이나 여자나 남자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곳 아닙니까? 누구도 예외를 둘 수 없는 곳으로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지는 은혜와 평화와 복을 받아 누리는 곳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불공평하고 왜 이리도 불평등하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폭리를 취하며 살던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과 오늘날의 교회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어디로 갔으며 그분의 가난함은 어디로 던져버렸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겸손하심과 고난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도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입니까?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과 마음은 어떠실까요? 메시아를 거부하고 성전을 장사 터로 삼았던 자들에게 임한 것은 심판과 멸망이었는데 주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못하고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한 이 시대에 하늘로부터 부어질 것은 무엇입니까? (명성교회와 재산, 성도와 부귀영화.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이미 심판이 시작된 것 아닙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성전 된 우리들의 몸은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오직 생명의 말씀, 오직 값없으신 은혜, 오직 온전한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이 세상의 것들입니까?
7.이제 47-48절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예수님께서는 백성들 사이에서 당시 기득권이 어찌할 방도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견고했는데(인기를 누렸는데) 왜 주님은 백성들로부터 버림받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백성을 향한 소원과 백성들이 바라는 예수님을 향한 기대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온전하게 충성하라. 하나님의 백성다움의 거룩함을 이루라.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에 목숨 걸지 말고 하늘나라를 차지할 성품이 되어라” 어려운 삶의 길을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쉽게 세상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는 그저 자신들을 편안하게 해주며 배부르게 해주고 고난 없이 살게 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8.세상에서의 부와 성공을 가르치는 교회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는 교회. 평화와 복과 은혜에 대해서만 메시지하는 교회와 주님을 위한 고난과 눈물과 헌신을 가르치는 교회……..오늘 여러분이 듣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바라시는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육체는 날마다 부패해져 가는데 말입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 주님께서 오늘 나를 바라보실 때 그 분은 기뻐하실까 아니면 눈물 흘리실까? 오늘 나는 귀에 듣기 좋은 말에 마음을 쏟는가 아니면 귀에 듣기는 힘들어도 생명이 되는 진리에 마음을 쏟는가? 나는 십자가의 도를 배우기 위해 주님의 교회에 나오는가? 아니면 적당한 위로와 세상의 복을 구하기 위해 나오는가? 예루살렘의 멸망처럼 시시각각 다가오는 심판과 구원 사이에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삶은 어디로 기울어있습니까?
우리가 지구라는 세상에는 어떻게 살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성취해야만 할까? 그리고 다시 이 지구를 떠날 때 우리의 마지막 고백은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