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러분은 트라우마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트라우마에 대하여 정신적인 상처만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정신적 육체적 상처 모두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의학계에서는 정신적 상처를 psychological trauma, 육체적 상처를 physical trauma라고 구분합니다. 그런데 이 트라우마의 어원은 헬라어에서 온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의사였던 누가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얼마나 심하게 때렸는지 트라우마가 된 것입니다. 깊은 상처 심각한 외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10장 34절에서도 누가는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얼마나 깊은 상처에 이러한 단어를 사용했는지 보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렇습니다. 거의 죽을 만큼의 외상을 입게 된 것에 사용한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질문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주인의 종이 깊은 상처를 입도록 맞은 것은 종에게만 국한 된 것일까요? 아니면 그 상처와 아픔이 주인에게까지 미친 것일까요? 선지자들의 고난은 선지자만의 것일까요? 아니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에게 얻어 맞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으시고 외상뿐만 아니라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입게 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할 때, 오늘 우리가 신포도와 같은 세상적인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 트라우마를 입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트라우마를 입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과 즐거움을 드리며 하나님의 자랑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랑!!!
2. 이제 본문 13-15절의 말씀으로 나아가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아! 인간의 어리석음이여!
탐욕에 갇혀 사는 자들의 무지함이여! 주인의 아들을 죽인다고 그 유산이 어찌 그대들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육체로 얻은 세상의 소유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성문 밖에서 죽였습니다.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태복음 27: 30-31)
어찌 이런 극악한 일을 벌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소작인 곧 잠시 세상을 빌려 살뿐이요 이슬처럼 한 순간에 흙으로 돌아갈 존재가 어찌 자신의 주인 곧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사랑으로 보내신 그리스도를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겨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었다니 도대체 그러한 인간의 악행은 어디로부터 나온다는 말입니까? 겨우 소작인이......!!!
3.창세기 3장 6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렇습니다.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하고 탐스럽기도한’ 이라는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그리스도마저 죽여버린 것입니다. 온통 소유욕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존재의 현주소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질문 드려볼까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재산은 무엇입니까? 수억 원 들어있는 저금통장, 금 덩어리, 다이아몬드, 땅 문서…과연 그것으로 여러분의 참 생명인 영혼을 담보할 수 있겠습니까?(양진호와 2000억 재산)그런데도 사람들은 끝없이 모으려고만 합니다. 그만하면 베풀 줄도 알고 섬길 줄도 알아야 하건만 다오 다오만 합니다. 과연 그에게 소망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기준과 욕심대로 사는 것, 나의 영광과 자랑을 위해 사는 것, 타인에 대하여 복음이 드러나지 않는 삶, 교회공동체안에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지 않는 신앙, 그것은 십자가의 주님을 여전히 거부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삶이 복음이 되고 성품이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 바로 그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 되기를 축복합니다.
4. 이제 본문 16-18절의 말씀보겠습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주인의 뜻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소작인들이 받을 심판은 진멸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및 장로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예수님이시며 포도원은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그리스도마저 거부하는 자신들은 버림을 받고 이스라엘의 포도원 즉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라고 펄쩍 뛴 것입니다. 복의 영광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 사랑의 은혜가 다른 곳으로 넘겨지는 것, 생명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나의 복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넘겨지는 것은 싫습니다.. 그렇다면 회개하고 돌이켜 복음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머릿돌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주님의 이 예언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오늘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5.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 거친 광야 같은 삶의 현장에서도 때를 따라 내리시는 단비와 소낙비, 이른 비와 늦은 비의 복을 누리며 승리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토록 함께하심의 임마누엘의 은혜에 둘러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이 얼마나 과분하고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가고 있습니까?혹시 여호와여! 여호와여! 하나님을 부르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던 타락의 정점에 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우리도 그러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겉은 그럴싸한데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품은 없고, 주여! 주여! 부르며 기도는 잘하는 것 같은데 희극배우처럼 살지는 않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은 읽고 듣는 것 같은데 그 삶에서는 세상보다 더한 죽음이 역사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6.“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세상 그 누구든지 무론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거나 말씀과 반대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머릿돌이신 예수님과 충돌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가루가 되어 흩어짐을 당하는 버림받는 존재가 됩니다. 다시 질문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까? 진실로 우리는 주님을 열매 맺는 사랑스런 참 포도 참 성도입니까?
로마서11장 20-21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이방인이었으며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나의 오늘의 삶은 극상품의 포도 맛을 내는 삶입니다. 만일 주님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이거나 육체의 죽은 맛이 드러난다면 꺾임을 당하고야 맙니다.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날마다 생명이 역사하는 삶이 되고픈가? 놀라운 삶의 복과 영혼의 복을 결실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답은 명쾌합니다. 참 포도의 맛을 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 돌이켜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모든 성도님들에게 그대로 성취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