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본문 19-20절의 말씀보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예수님 당시의 종교주의자들 곧 입으로는 여호와여 여호와여 라고 부르기는 했으나 오히려 겉 다르고 속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체가 밝혀지자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더욱 안달 했습니다. ‘예수가 제거되어야 우리가 산다. 그가 사라져야 우리의 재산과 권력이 유지된다.’ 그러나 종교주의자들은 백성들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신속히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이제 정치적인 꼼수로 예수님을 걸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혈안이 된 종교주의 자들의 실상이 담겨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 유대 땅에서 펼쳐지는 예수님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과 신비한 행적을 보고 하나님의 메시아로 알아보고 백성들보다 더욱 주님의 편에서 따르고 협력하고 일했어야 했는데 어떻게 이리도 야비하고 악한지 말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죽음 당하겠습니까? 절대진리가 가려지겠습니까? Never !!! 저와 여러분의 삶은 오직 영원한 생명 절대진리이신 예수님께 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여기에서 질문한가지 드리겠습니다. 복음은 정치적인 것일까요? 아닐까요? 다른 말로 복음은 정치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결코 정치를 하지 않으셨듯이 복음도 결코 정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을 정치에 이용합니다.
오늘날 그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성소수자 권리/ 차별금지법) 관련법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동성애는 반드시 돌로 쳐죽임 받아야 할 가증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남자와 여자를 각각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그런데 이 동성애에 대한 것이 어느새 정치의 중심에 서있고 목사들조차도 의견이 서로 갈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문제를 정치화시켰고 목사와 목사를 성도와 성도를 편가르게 했을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권을 가장한 사단의 세력들입니다.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소수인의 인권을 중요시하는 것 같은 의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정탐꾼들! 인권을 가장하고 나타난 적그리스도인들…….그들은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활개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의인의 모습으로 가장한 정탐꾼들을 가려낼 분명한 눈이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이 혼탁한 시대 속에서 참되고 온전한 신앙으로 세워주며 세상권세에 넘어지지 않게 하겠습니까? 오직 말씀의 투구와 검,말씀의 창과 방패로 무장된 저와 여러분이 되어 그 어느 것에도 휩쓸리지 않고 순결하고 올곧게 주님의 길로 나아가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이제 21-22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아! 현란한 말솜씨를 가진 의인의 모습을 한 정탐꾼들!!! 오늘날도 많을 것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 현란한 술수에 넘어갑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가운데서 세속화된 종교인들이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놓은 올무는 세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질문 드려봅니다. 세금은 정치적인 것일까요 신앙적인 것일까요? 세금은 분명하게 정치적인 영역입니다. 그럼에도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세금의 문제를 들이대며 예수님께 답을 종용합니다.
정치와 종교! 안타깝게도 인류의 역사는 바로 이 두 권력 사이에서 이어져왔고 현재진행형입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정치인들이 때만 되면 교회로 몰려가서 인사하기 바쁩니다. 심지어 과거의 대통령들은 자신이 궁지에 몰리면 대형교회들을 방문해서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자신의 정치를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까지 이용하는 것입니다.
4.어디 그뿐입니까? 목회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리새인처럼 타락한 목회자들이 정치를 이용하여 자기자랑을 일삼았습니다. ‘나는 대통령과 가깝다. 우리교회는 대통령이 오는 교회다. 오늘 나는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밥 먹고 왔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 곧 빈부귀천 남녀노소불문하고 평등하게 하나님께 나아와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아뢰며 변화 받는 곳입니다. 또한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먹이는 것이 그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들이 편가르기를 합니까? 그런데 왜 교회들이 차별을 둡니까? 그런데 왜 목회자들이 시장을 만나고 국회의원을 만나고 대통령 만나는 것을 자랑과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니 쉬지 말고 복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정치인이었습니까? 교회가 정치화된 다는 것은 세속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곳에는 죽음의 일들이 난무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로 복음만을 따르는 순결한 신앙인입니까?
5.이제 23-25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맛에 붙들려 사는 악한종교인들의 간계를 아셨습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소설 쓰나!!! 소설 같은 말이지만 이것이 실제이고 진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져본 도마가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인간인 동시에 신이신 분!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신데 무엇을 감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주님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구름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고 이슬저장고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며 또한 우박창고는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별이 몇 개인지 바다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산림의 나무들은 몇 그루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그 모든 만물의 창조 안에 계신 주님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 대들고 속이려 합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신은 없다.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짓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얼마나 무지하고 교만합니까? 그래서 택정함을 입고 부름 받은 성도들이 복된 것입니다. 믿음! 믿음이라는 하나님과 그 세계를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입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그 믿음을 따라 풍성하고 놀랍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도!!!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사단의 자녀 되지 않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가 되지 않음이, 오직 주님 따라 살아감이……여러분이 바로 그 복의 사람들입니다.
6.24-25절 다시보겠습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렇습니다. 가이사의 통치아래 사는 사람은 가이사가 정한 세금을 내면 됩니다. 한 사람이 그 삶을 살아가는 곳의 통치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분명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로마서13:7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면 되고 헝가리에 살면서 헝가리가 정하는 질서에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성도들은 그 얼굴을 지나 영에는 어떤 형상이 새겨져 있을까요? 정말 우리의 얼굴과 영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직인이 찍혀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누구의 소유이며 누구에게 돌려야 할 삶입니까? 그런데 왜 오직 주님의 교회를 돌아보는 일에 힘쓰고 땀 흘려야 할 목회자들이 정치인보다 더 정치적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왜 성도들은 그런 목회자들 더욱 높이 받들고 섬긴다는 말입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진실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의 통치자들에게는 복종까지 하며 사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 불충성 불의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불순종 불충성 불의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나님의 소유인 저와 여러분의 온 삶이 오직 하나님께 드림이 되고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되기를 바랍니다.
7.이제 2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 하니라.” 죽음이 어찌 영원한 생명을 넘볼 수 있으며 사단이 어찌 그리스도를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성도가 성도답게 세상에 맞서고 싸울 때에 세상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갑니다. 세상이 성도의 삶을 얕잡아보고 넘어뜨리려 하다가 오히려 지가 넘어지는 우스운 꼴을 당하고야 맙니다. 우리가 언제나 성도다워야 할 이유와 조건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속한 세상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이기에,늘 하나님의 전능의 손이 도우시고 힘주시기에 그리고 예수님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 하니라.”
저는 여러분의 삶이 세상에 대하여 이 말씀 그대로 결실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말씀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에 세상은 홍해 갈라지듯이 갈라져 버리고 위대한 승리로 하나님께 영광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