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20-21)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헌금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늘에 쌓는 자신의 보물이 됩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얼마나 됩니까?
1. 먼저 본문 1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성전은 미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인의 뜰이 나옵니다. 물론 여인의 뜰을 지나면 이스라엘의 뜰이 나오고 제사장의 뜰이 나옵니다. 제사장 뜰 바로 앞에는 제물을 잡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관을 지나면 성소가 나오고 마지막에 지성소가 놓여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성전의 여인의 뜰에서 자주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뜰에는 헌금함이 놓여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9-20절의 기록입니다.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 예수님께서 우연히 보셨을까? 아니면 일부러 주목하고 보셨을까? 아마도 자연히 보게 되셨을 텐데 그것이 동기가 되어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유심히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목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것을 보셨다면 무엇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헌금은 형식일까요? 아니면 마음중심일까요? 헌금은 물질일까요? 아니면 믿음의 척도일까요?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형식과 모양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는 마음중심을 살피십니다. 마음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과연 주님의 마음에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이 어떠했을까? 괜찮았을까? 아니면 부족하다 하셨을까?
여러분! 예수님 당시 부자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부자였습니까? 여러분들도 잘 알듯이 당시 유대인들의 기득권은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에게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부자요 넉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과연 그 부자들이 온전한 헌금을 드렸을까? 만일 그들이 온전한 헌금, 합당한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두개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했을까? 진실로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을까? 누군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누군가 진실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확고하다면 그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충성의 정도는 어떠하겠습니까?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12:30)
그래서 헌금은 물질이 아니라 한 사람의 믿음의 척도가 됩니다.
3. 우리는 본문 2-3절의 말씀에서 그 증거를 보게 됩니다.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의 눈은 이제 한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에 다다랐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한끼 먹고 살기도 힘들 텐데 무슨 물질이 있어 헌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여인은 헌금함으로 나아갔고 두 렙돈을 봉헌하였습니다. 두 렙돈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여러분이 많이 들어오신 것처럼 한 데나리온이었는데 한 데나리온은 여덟 개의 렙돈의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두렙돈은 노동자의 하루품삯의 4/1정도 되는 것입니다. 두 렙돈의 헌금! 작은 물질일까요? 큰 물질일까요? 두 렙돈의 헌금! 모양만 낸 것일까요? 아니면 힘에 넘치도록 드린 것일까요?
큰 물질이요 힘에 넘치도록 드린 예물입니다. 물론 연봉이 억대인 사람이 볼 때 만원의 가치는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 내일의 먹거리를 장담할 수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만원의 가치는 부자들의 몇 십 만원 혹은 몇 백 만 원 이상에 해당하는 무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담기면 부족한 것도 넘치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담기면 작은 것은 큰 것이 됩니다. 선물이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작은 것도 마음을 담아 선물하면 감동을 받습니다.
4.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하신 말씀은 본문 4절에서 다음과 같이 확장됩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이 여인에게서의 두 렙돈은 생활비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한 달의 생활비였는지 혹은 일주일의 생활비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어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아주 극한 가난가운데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도대체 이 과부는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어떠했기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헌금으로 다 드리고 나면 당장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끼니를 채울까? 걱정이 될 텐데 말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생활비전부는 이 과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정도였던 것입니다. 즉,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는 믿음과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눅12:22-24)
그렇습니다. 세상에 대한 염려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헌신과 충성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세상에 대한 염려가 큰 사람은 많은 재물을 쌓아놓고서도 하나님께 인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은 육신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이 과부와 같은 헌신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 그리고 사랑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큽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큽니까?
6. 저는 오늘의 본문 속에서 강조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3절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라는 말은 헬라어로 ‘알레소스’라 하는데 그 의미는 ‘진실로 그렇습니다. 아멘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가난한 과부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아멘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그 믿음을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겨우 두 렙돈을 헌금으로 드렸는데 예수님께서 ‘저 여인이 참으로 누구보다 많은 헌금을 하였다. 저 여인의 믿음이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보다 진실로 크다. 저 여인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아멘이다.’ 하셨으니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정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과 헌신과 충성이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과 사랑과 헌신이 아멘 이야!!!’ 하실 수 있을 만큼이 되기를 바랍니다.
돈의 액수가 아니라 사랑의 정도입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믿음의 수준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이 세상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영광을 낳습니다.
7. 저는 이제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나 깊은 의미를 두고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드린 이 과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 한참을 굶었을까? 생활비가 없어 이리저리 돈을 꾸러 다녔을까? 또한 예수님께서는 과연 이 가난한 과부를 칭찬만하셨을까? 믿음이 남달랐던 이 과부는 과연 사르밧 과부에게서 일어난 일을 확신하고 있었을까? 자신에게 남겨진 한 움쿰의 밀가루와 기름으로 엘리야의 요청대로 떡 한 덩이를 베푼 사르밧 과부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17:14절)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들의 삶의 보장이요 영광이요 승리이시라고 성경은 힘주어 증언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이에 합당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