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경비원8명이 자신들을 위해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시행하는 에어컨 설치를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대다수 입주민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거나 장애인들로 경제적 취약계층이라 에어컨 설치가 어려운 데다가 경비 초소 내 에어컨 설치로 느낄 상대적 박탈감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경비원 A씨는 "뙤약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꼭대기층 입주민보다 아파트 1층에 위치한 초소가 덜 덥다"면서 "덥긴하지만 더 더울 주민들을 생각하면 선풍기 1대로 여름한철 40~50일을 견딜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약자를 위한 배려!!!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렇게 이웃을 배려하며 산다면 예수 믿고 새 삶을 살겠다는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할런지요?
1.19-2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두 사람의 이야기:
1)부자의 삶- 조개에서 추출한 염료로 만든 아주 비싼 옷인 자색 겉옷과 아주 고운 베로 만든 속옷을 입고서 날마다 럭셔리한 잔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에게는 과연 만족함이 있었을까?
2)거지 나사로:(엘르아살: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하나님께서 도우셨다.) 온 몸에 헌데투성이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이 부잣집의 대문에 버려지듯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 집에서 나오는 빵부스러기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신체적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자신을 귀찮게 하는 개를 쫓아 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3)과연 이 두 사람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상태로 영원히 계속될까요? 즉 부자는 영원히 그 부를 누리고 가난한 자는 계속해서 가난함의 고난을 받게 될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상황으로 바뀔까? 부자는 과연 자신의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 알고 있을까? 또한 거지 나사로는 자신의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만이 자신의 구원됨을 보게 될 것인가? 오늘 저와 여러분은 장차우리가 맞이하게 될 이 세상 너머의 세계를 예상하고 있습니까?
2.22-26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인간존재에게 닥치는 예외 없는 현실:
가난한 자도 죽고 부자도 죽는다. 낮은 자도 죽고 높은 자도 죽는다. 그리고 죽음의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죽음은 언제든지 찾아온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인간존재의 삶의 시작은 바로 이 진리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그 운명의 시간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아내게 될까? 두려울 것이 있을까? 아니 죽음을 준비했으니 오히려 모든 일에 담대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교만할까? 아니 더욱 겸손할 것이다. 죽음이 코앞에서 도사리고 있는데 목에 힘줄 일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인색하고 무정하게 살겠는가? 아니 더욱 섬기며 사랑하며 살게 될 것이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사람에게서의 최고의 영성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전에 더욱 많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죽음을 준비해 놓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가장 큰 지혜자입니다.
[전]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죽음 후에 갈라진 운명:
1) 나사로의 운명: 가난할 뿐 아니라 병들어 사람취급도 못 받고 살던 나사로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아브라함이 들어간 곳으로 들어가 위로 받는 삶을 살게 되었다. 나사로는 가난하거나 병들었기 때문에 그 복된 곳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의 삶이 그 나라에 합당하였기 때문이다.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과 어려움의 삶의 결과는 끝없는 위로입니다. 또한 주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과 핍박의 결과는 측량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벧전]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크고 작은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할 준비된 믿음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구원의 결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누릴 영광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무엇입니까? 일시적인 즐거움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영광입니까?
2) 부자가 마주한 운명: 호화로운 삶의 연속가운데 살던 부자가 죽음 후에 마주한 운명은 손가락 끝에 살짝 찍힌 물 한 방울도 안 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불구덩이입니다. 그 힘있던 부자는 어찌해서 이 험한 곳에 들어가게 되었을까요? 세계최고의 디자이너가 만든 겉옷과 속옷을 입었기 때문일까? 매일 럭셔리한 호텔에서 최고급 요리를 즐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궁궐 같은 집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아닙니다. 성경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부유함을 즐겼기 때문에 불구덩이에 던져졌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예화를 들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다름아닌 삶입니다. 부자다움의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의 실수와 실패는 무엇입니까? 호화로움의 극치를 누릴 만큼의 넉넉한 부자인 자신의 주위에 있는 굶주린 사람들, 병든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을 돌아볼 충분한 여유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것이 바로 그의 실패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 나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욕심 가득한 삶의 결국을 그가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여유 있다는 것은 힘이 아닌 책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소고기 두 덩이 먹을 때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그것의 10/1을 나눈다면 어떨까? 내가 최고급 옷을 서너 벌 살 때 그 중의 5/1을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면 어떨까? 부자는 그것의 신비를 몰랐습니다. 자신의 것을 나눔으로 누리게 될 부유함과 행복함! 이 땅에 것을 베풂으로 얻게 될 하늘의 것을 말입니다. ‘아! 쌓아놓고서도 가난했던 불쌍한 부자여! 아! 배불리 먹고서도 굶주렸던 가련한 호화로움이여!!!’
저와 여러분은 밝히 알아야겠습니다. 나눔으로 얻게 될 부유함과 행복함의 신비! 이 땅의 것을 팔아 하늘의 것을 얻는 신비! 좀과 동록이 해하지 않는 하늘창고에 쌓는 삶!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의 한시적인 삶이 영원한 결과를 결정합니다. 영원한 영광이냐? 영원한 형벌이냐? 하는 자유의지 선택의 기로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삶은 무엇입니까?
27-31절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불구덩이의 고통 중에 있는 부자였던 한 사람의 소원:
부자는 불구덩이의 고통 중에서도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종교성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세상으로 다시 보내어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자신의 가족이 지옥 불에 던져지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인간의 완악함, 교만함의 뿌리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기적으로 외칠지라도 여전히 듣지 않을 만큼 강하고 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대상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아버지라 부르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세상의 영광을 하늘영광보다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이 세상의 소유를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16장 14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님의 말씀조차도 비웃던 사람들에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 경고한들 어떤 두려움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너희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을 넘어선 나의 메시지를 듣고 삶을 고쳐야 구원에 이른다. 너희들 지금의 삶으로 괜찮겠어? 너희들의 처지가 장자 불구덩이에서 고통당하는 이 부자와 같지 않겠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형식입니까 실제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자신들의 배만 위하는 죽음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믿는자였지만 믿는자 다움의 능력이 없었습니다.오늘 저와 여러분의 자유의지는 무엇을 향한 선택입니까? 자신의 육체를 위한 제한된 호화로움입니까? 아니면 영혼의 영원한 영광을 위한 가난한 고난입니까?
능력 있는 리스도인!!! 그는 삶으로 승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