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예수님의 우리성도를 향한 제자 됨의 영적 인격 그 첫 번째 레슨은 신실함입니다. 신실함이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진실 된 삶,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순결한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했으나 내적인 삶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했지만 그 자신들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즉, 외식하는 자들, 모순 덩어리였습니다. 그들의 외식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23:13절)
이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들도 천국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조차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자신들의 삶으로 사람들은 지옥으로 인도해 간 것입니다.
2.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믿음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참 신앙의 길을 안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차라리 그 자신의 목을 연자 맷돌에 매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겠다.’ 하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높습니까? 예수님까지 십자가 죽음으로 내어주신 사랑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랑의 길을 방해하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천지 사람들 각종 이단자들 거짓된 목사들 그리고 외식하는 성도들……..
그들은 자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어디로 끌고 가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임할 심판의 진노가 어떨지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성도는 바리새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귀로 듣고 멈춘 죽은 신앙이 아닌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천국문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천국으로 인도해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실함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신실한 삶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 그 이상의 영광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인 신실함으로 하나님께는 충성하고 뭇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는 신앙인의 기준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성도들을 향한 제자 됨의 두 번째 영적 성품은 자비함입니다. 그 어떤 사람에게 한두 번 용서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번 실수한 것을 두고 평생원수 맺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하루 일곱 번씩 용서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살아낼 수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라면 끝없이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자신이 바로 그 끝없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에게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죄를 지를 때마다 심판하셨다면 아마도 우리는 벌써 다른 세계의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자신이 하루에 몇 번 죄를 범하는지 세어보신 분 있습니까? 입술로 눈으로 말로 손으로 발로 마음으로……..포기합니다. ‘아! 끝없는 자비로 나를 용서하시고 품으시는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죄가 가득한 존재인 나…..그런데 여전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도대체 어떤 자비를 입고 사는 것입니까?
4.누가복음11장 4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심장, 새 생명을 받은 성도는 늘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성도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면 어찌 그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며 어찌 그의 삶에 하나님의 통치의 은혜가 덮이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원수 맺고 사는 삶은 아직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자비, 어떤 용서,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를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의 죄 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가 내 심장 안에 살아 숨 쉰다면 용서하지 못할 죄가 어디 있으며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자비의 삶을 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심장 안에 살아계신 십자가의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루 일곱 번 삼십일이면 210번. 용서는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제자 된 성도들의 삶의 개념입니다
에베소서 4:32절의 말씀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끝없이 용서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일까요? 천국의 은혜, 천국의 기쁨 아니겠습니까? 그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주님의 참 제자 된 저희가 되기를 바랍니다.
5.5-6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성도를 향한 제자 됨의 영적 성품 세 번째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어찌된 일인지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끝없이 자비를 베풀려면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도들로서 나름 충분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한지가 몇 년이야?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체험했어? 예수님도 이젠 우리에게 큰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실까?’
그러나 제자들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이보신 제자들의 믿음의 상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If you have faith as small as a mustard seed”
어찌된 일일까요?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믿음은 머리로 깨달은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것, 혹은 배운 것을 자신의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 알아요. 하나님이 불도 내리시잖아요.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도 먹이셨잖아요.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다니셨잖아요. 나는 그 사실을 알아요.’
6.그러나 이러한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그들은 머릿속으로 아는 것을 자신의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거든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곧 자신들의 믿음인줄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습니까? 믿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알아봤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제자들에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앎과 지식이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곧 그 자신의 믿음이란다. 너희는 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뽕나무에게 여기서 뽑혀 저 바다에 떨어져라. 하고 선포한적 있는가? 너희는 저 사람들을 괴롭히는 아무런 쓸모없는 악한 귀신에게, 혹은 불치병에게 여기에서 즉시 떠날지라 하며 하나님나라를 선포한 적이 있느냐? 너희가 나를 안다고 다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나와 같이 행하는 자가 믿음의 사람이다.’ 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7.하나님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사람입니까? 진리는 명백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란 불가능의 영역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신뢰하며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다가 갈라질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하나님께서 가르실 것을 믿고 바다를 향하여 발걸음을 움직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 큰 믿음의 사람. 믿음 위에 믿음을 행하는 사람 아니 일생의 모든 일에 믿음으로 맞서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가운데 충만으로 이루어 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7-10절: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제자 됨의 영적 성품에 대한 예수님의 네 번째 가르침은 나는 무익한 종이라 여기는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오늘의 이야기는 우리의 심장을 숙연하게 합니다. 왜 우리의 심장이 숙연해질까?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결코 그러한 종이 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는 것 같은 교회의 일을 행하고서 ‘내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데…….내가 없었으면 우리교회는 건축도 못했어. 이 교회가 가장 힘들 때 내가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데 나를 이렇게 대우해…….’
우리는 너무나 당당하다 못해 당돌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게다가 주인이 먹고 마실 때까지 묵묵히 수고하고 기다리기는커녕 이 땅의 삶을 위해, 육체의 자랑을 위해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오히려 자신의 종처럼 부리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9.과연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아버지! 저는 참으로 무익한 종입니다. 제가 행한다고 하였지만 혹시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지는 않았는지요? 저보다 더 충성스럽고 지혜롭고 열심인 사람을 보내셨더라면 우리교회가 더욱 귀한 교회가 되었을 텐데요. 저같이 무능한 사람 말고 능력 있는 사람 보내셨더라면 이 땅 헝가리가 더욱 복음으로 새로워졌을 텐데요.
아버지! 저는 참으로 무익한 종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성도들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랑할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내세울 공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증언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끝없는 충성 뒤에도, 몸이 다 부서지는 것 같은 헌신 뒤에도 주님의 제자 된 저와 여러분이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제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라는 겸손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