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물리적인 사역공간은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였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오늘날의 도로상황으로 계산했을 때 약 140km 정도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공간을 다니시며 온갖 종류의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들은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삶의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로 나아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현재도 연약한 우리인간에게 힘이 되시고 고난당하는 우리 인간에게 해결이 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능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삶의 구원이시라는 참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한국에서 유럽까지 펼쳐져 있는 인간들의 삶의 자리……그곳에서 매일 터지는 나의 삶의 문제의 구원은 누구이며 나의 삶의 성취는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영혼의 구원은 누구로 말미암겠습니까? 다윗이 증언합니다.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시18:46)
2.사마리아와 갈릴리경계에 놓인 한 마을을 지나시던 예수님께 한 무리가 소리쳤습니다.“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입니다. 가족과 격리되고 사회와 격리되어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불리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삶의 실상이 너무나 열악해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였습니다.
레위기13장 45-46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이스라엘백성으로 진영 밖에서 산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지나 하나님께도 버림받은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스라엘백성! 그는 죽은 자입니다. 가족이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편안하고 안락한 집이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다시금 사회 속으로 들어가 평범하게 일하는 생활을 얼마나 갈망하겠습니까? 과연 이 사람들을 이 암흑의 자리에서, 이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할 이는 누구이겠습니까?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돈으로 해결이 될까?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세상권력으로 돌이켜 놓을 수 있을까? 죄로 죽은 인간존재에게 과연 구원은 누구입니까?
14절: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지라.”
3.나병환자들의 삶의 고난을 이미 아신 예수님!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단 한마디였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 몸이 구원을 얻었다, 나음을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의 피부는 여전히 병들어 있었지만 예수님의 선포와 함께 이미 그들은 치유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 문제란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사장들을 향하여 가야 했습니다. 몸은 여전히 나병으로 가득한데 아직 낫지 않은 몸을 가지고 어찌 제사장에게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자신들의 눈에 나음의 증거가 전혀 보이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몸이 온전해졌음을 증명해줄 제사장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과연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그 믿음의 길을 걷게 될까?
4.‘아니 낫지도 않았는데 어찌 제사장에게 가라 하십니까? 우리가 돌에 맞아 죽으면 책임지시겠습니까? 뭐가 증거가 있어야 갈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런 저항이나 의심도 없이 제사장들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지라.”……….’그가 믿음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응답을 받은 지라. 그가 믿음으로 말씀을 읽는 중 나음을 입었더라. 그가 믿음으로 충성하다가 큰 은혜를 입었더라.’
그렇습니다. 믿음 없이 어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부르며, 믿음 없이 어찌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며, 믿음 없이 어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없이 어찌 오늘이라는 이 광야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또한 믿음 없이 어찌 사업을 하며 직장에 다니며 학업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믿음이여! 하늘의 것을 땅에서 성취하는 힘이여! 믿음이여! 불가능의 것을 가능으로 열매 맺게 하는 능력이여!!! 저는 우리성도님들의 삶이 오직 믿음되어 모든 불가능의 벽을 넘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15-17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5.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감하는 사람들의 슬픈 실상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본문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정황적인 해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심을 따라 제사장들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던 나병환자들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에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봐! 내 몸이 보이나? 이렇게 깨끗해졌잖아! 아기피부 같아졌어.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 우린 이제 살았어!’ 열명의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감탄하고 환호하고 기뻐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 나병환자 중에서도 어쩌면 더 차별대우를 받았을지도 모를 사마리아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께 돌아갑시다. 제사장에게 갈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께 가서 감사를 드립시다.’ 그러자 아주 잠시 냉한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의 제안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 그것도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먼저 가서 제사장에게 깨끗해진 우리의 몸을 보여야 합니다. 가족이 우리를 얼마나 기다리겠습니까? 맞아요 맞아! 가족이 얼마나 그립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우리가 깨끗해졌다는 확증을 받고 우리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감사는 나중에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마음이라면 나는 혼자라도 예수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그것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신 그분께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마음대로 하시오. 그런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7.그렇습니다. 그 참혹한 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은 열사람 중 단 한 사람만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은혜에 깊고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죽지 못해 사는 처지에 놓였던 자신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린 이 한 사람! 깊고 깊은 감사를 드린 이 한 사람! 그의 영혼의 상태는 어떨까요? 또한 새 새 명을 얻는 영광의 은혜를 입었으나 주님의 방향이 아니라 가던 길을 계속 간 다른 아홉 명의 영혼의 상태는 어떨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는 누구와 일치합니까?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의 발 앞에 자신을 꺾어 엎드린 이 한 사람입니까? 아니며 가던 길을 향해 계속 나아간 꺾이지 않은 아홉 명의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베푸신 그 은혜는 그 값이 너무 고귀하고 비싸서 온 세상의 모든 금과 은을, 온 세상의 모든 달러와 유로를 다 더해도 결코 그 값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인데 과연 우리는 세상을 향해 달음질 치던 것을 멈추고 예수님께 꺾인 자, 영으로 살아가는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8.만일 우리가 꺾이지 않은 자, 은혜 베풀어주신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살던 세상을 향해 달려간 사람들처럼 여전히 육체를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증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육체와 함께 그 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그들의 삶의 모든 일은 성령으로 행하는 능력이 됩니다. 예배를 영이 아닌 세상권력을 얻은 힘으로 드리면 어찌될까? 성경말씀을 영이 아닌 세상지위를 얻은 육체로 읽고 들으면 어찌될까? 섬김과 충성을 영이 아닌 뻐김과 자랑이 난무한 육체로 행하면 어찌될까? 또한 하나님의 사람인 성도가 직장생활도, 사업도, 자녀를 기르는 것도, 학업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모두 영이 아닌 꺾이지 않은 육체 하면 어찌되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여기에서 멈춰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행하는 종교인 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통해 이 땅에서의 복을 얻습니다. 잘되고 높아지고 명성을 얻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 받은 복에 취하여 그 믿음의 삶 즉, 자신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께 다시 돌아오는 신앙을 멈춥니다. 아무리 높아질지라도, 아무리 부요 해 질지라도 그 길로 나아가기를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오는 영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비록 이 세상에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을지라도 그것에 도취되지 아니하고 다시 자신을 주님 앞에 꺾는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부와 명예에 도취되어 육체로 사는 사람들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다수가 그렇습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9.아홉 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긍휼의 은혜를 따라 그들의 믿음대로 나병으로부터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그 아홉 명의 나병환자는 깨끗해진 몸, 건강을 회복한 육체를 가지고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어떻게 살았을까?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꺾이지 않은 삶, 예수님이 없는 삶으로 말입니다. 그들의 육체는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통하여 나음을 입었는데 만일 그들의 영혼은 구원 받지 못했다면 과연 고침 받은 그들의 기적의 몸은 무엇을 위해 유익했다는 말입니까?
믿음의 결국은 이 땅에서 복을 넘어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성도는 이 세상에서 복 있고 은혜롭고 형통하게 사는 것을 넘어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마지막까지 그 자신을 예수님께 꺾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이 저와 여러분에게서 결실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